카를슈타트

카를슈타트

다른 표기 언어 Andreas Rudolf Bodenstein von Karlstadt
요약 테이블
출생 1480경, 뷔르츠부르크 주교구 카를슈타트
사망 1541. 12. 24, 스위스 바젤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의 초기 지지자였으나 후에는 루터의 견해에 반대하여, 특히 성찬식에 관해 루터보다 더 철저한 교회개혁조치들을 주장했다.

에르푸르트와 쾰른에서 공부한 뒤 1505년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고, 이 대학교에서 마르틴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로마 가톨릭 전통의 '고대 교부들'에 관한 신학연구를 재계획하는 일을 도왔다.

면죄부 논쟁이 벌어지고 죄인들에게 사죄를 베풀고 정결케 하기 위한 형벌을 면제받게 해준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교한 체계에 루터가 반대하고 나섰을 때, 카를슈타트는 1519년 7월 라이프니츠 논쟁에서 요한네스 에크에 맞선 루터를 옹호했으나, 이 논쟁의 승자는 에크로 평가되었다.

1520년 레오 10세가 공포한 루터에게 파문으로 위협하는 교황칙서에는 카를슈타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1521년 왕 크리스티안 2세의 요청으로 덴마크에 갔으나 그가 의도한 종교개혁이 무산되자 6월에 독일로 돌아왔다. 그뒤 성직자 독신주의, 사적인 미사, 빵과 포도주 모두를 사용하여 집행하는 성찬식 등에 관한 많은 소논문을 펴냈고, 이로써 1521년말에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성탄절에 성직복을 입지 않은 채 간단한 예배를 보면서 평신도들에게 성찬식을 집행했다.

1522년 1월 비텐베르크 행정관들은 부분적으로 루터의 사상과 카를슈타트의 제안에 근거하여 실질적인 개혁들을 단행했다.

그러나 카를슈타트는 성상파괴론을 담은 소논문 〈성상배척에 관하여 Von Abtuhung der Bylder〉(1522) 때문에 2월에 선제후(選帝侯) 현명왕 프리드리히에게 소환당해 당시 만연하던 혁명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에 관해 심문당했다. 정치적인 소요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 바르트부르크에 은거해 있던 루터는 자제를 촉구하기 위해 대중 앞에 나섰다. 루터는 약한 형제들을 돌볼 것을 강조하는 몇 차례의 명연설을 하면서 더욱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던 카를슈타트와 논쟁을 벌였다.

카를슈타트는 곧 도망쳐 농민복장을 하고 자신을 '형제 안드레아스'라고 소개하며 살았으며 모든 학위와 명성을 포기했다. 1523년 오를라뮌데로 내려가 독자적인 종교개혁 계획을 소개했다. 신비주의자 요한 타울러에게 영향을 받아 예나에서 이해하기 힘든 말로 가득한 소책자들을 계속 펴냈다. 다음해 8월 예나에서 루터와 극적으로 다시 만났는데, 이때 루터는 공개적인 적의(敵意)의 표시로 그에게 금화를 던졌다.

루터가 떠날 때 그는 종을 계속 치게 해놓고 루터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그 이전부터 무리한 행동을 해온 터라 루터가 간 뒤 그도 곧 추방되었고, 그뒤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연속 소논문들에서 성찬식에 그리스도가 단지 상징적으로만 임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루터 진영에 심각한 해를 끼쳤다. 성찬식을 둘러싼 논쟁은 종교개혁 운동에 공공연한 상처를 남겼으며, 카를슈타트의 소논문 〈천천히 갈 것인가? Ob man gemach faren soll〉는 훗날 재세례파(성인세례를 주장한 사람들)의 모태가 된 급진주의자들이 열심히 읽었다.

그럼에도 루터는 카를슈타트가 몇 가지 주장을 철회하자 비텐베르크에 은신처를 내주었다(1525~29). 카를슈타트는 홀슈타인·프리슬란트·취리히에서 잠시 머문 뒤 1534년 바젤대학교 구약신학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지역 성직자들에게 대학교의 훈련을 받을 것과, 자질을 높이기 위해 박사학위를 받을 것을 요구하여 또 한번 논쟁에 휘말렸다.

그는 그 대학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학문적인 훈계와 지적인 목회에 반대하던 예전의 태도를 철회했다. 성격이 괴팍했던 그는 훗날 전염병으로 죽을 때까지 강하고 꾸밈없는 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