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남북공동성명

7·4남북공동성명

다른 표기 언어 七四南北共同聲明

요약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을 동시에 발표했던 성명이다. 중상비방 및 무장도발 금지, 남북적십자회담 실시를 위한 적극협조, 서울과 평양 간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의 합의사항도 포함되었다. 공동 성명의 발표 배경은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와 국내의 정권 안정 및 명분 추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 성명은 통일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 없이 정부 당국자들 간의 밀담을 통해 처리되었다는 한계성과 통일 논의를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빛을 잃었다. 그러나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며 군사적·이념적 대결을 절대시했던 통일 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7 · 4남북공동성명
7 · 4남북공동성명

이 공동성명은 당시 남한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던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즉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획기적인 통일의 3대 원칙을 발표했던 것이다. 공동성명에서는 이밖에도 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금지와 무장도발 금지, 민족적 연계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한 다방면의 제반 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실시를 위한 적극협조, 서울과 평양 사이의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 중요한 합의사항들이 발표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한 사이의 제반 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 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남한의 이후락과 북한의 김영주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했다.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이 무력통일을 포기하고 자주적·평화적인 통일을 다짐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공동성명이 발표되기까지는 중요한 국내외적인 배경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1972년 2월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 등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온 닉슨 독트린은 한국 정부가 완강히 반대해온 주한미군의 철수를 의미해 한국의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인 김대중 후보와의 경합에서 위협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안정과 명분추구를 위해 남북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를 통해 남북한 간의 '선의의 경쟁'을 제의했고, 이어서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남북한 이산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북한도 1970년대 들어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에 자극을 받아 통일정책에서 전환을 보여왔다. 이에 북한은 남한의 제의를 즉각 받아들여 양측은 각각 서울·평양을 상호 방문했으며, 1972년 5월 이후락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수상을 만나고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했다.

이같은 비밀접촉을 통해 남북한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원칙에 합의했으며 이를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천명한 것이다. 이 성명은 분단 이후 통일과 관련한 최초의 남북한 공동성명이라는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7·4남북공동성명이 남북한 주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남북대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날인 1972년 7월 5일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이 국회에서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정부측 입장을 설명하면서 "국제연합(UN)은 외세가 아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북한과의 공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공법·국가보안법은 폐기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는 공동성명에서 남북한이 합의한 조국통일을 위한 3대원칙에 어긋나는 내용이기도 했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지 3개월 만에 통일을 구실삼아 10월유신을 통해 반민주적인 유신체제가 들어섰고, 북한도 유신헌법이 선포된 후 2개월이 지난 1972년 12월 주석제를 도입하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공포해 더욱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창출했다.

결국 7·4남북공동성명은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없이 정부당국자들간의 밀담을 통해 처리되었다는 한계성과 통일논의를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빛을 잃었다. 그러나 기존의 외세의존적이며 군사적·이념적 대결을 절대시했던 통일노선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조국통일의 올바른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