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측천무후

다른 표기 언어 Wu Hou , 則天武后
요약 테이블
출생 625
사망 705. 12. 16
국적 중국, 당(唐)

요약 측천무후는 본명은 무조, 무후, 무측천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고종의 비로 들어와 황후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생애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당에서 주로 변경하고 천수라는 연호를 썼다. 무후는 당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했다.
13세에 당태종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가 태종이 죽자 당고종의 비가 되었다. 그 후 궁중 내 비빈들을 제거하고 황후까지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후 자신의 반대세력들을 차례로 모두 숙청하고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인재들을 중용하여 제국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탁월함을 보였다. 이 인사정책은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중국 사회를 사대부 가문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다.

측천무후
측천무후

본명은 무조(武曌). 무후, 무측천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고종(高宗:649~683)의 비(妃)로 들어와 황후(皇后)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생애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다. 무후는 당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의 후궁으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649년 태종이 죽을 무렵 이미 태자(후의 고종)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죽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어 불사(佛寺)에 은거하고 있던 중 신임황제인 고종이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고종은 마침내 무후를 궁중으로 데려와 소의(昭儀)라는 비의 지위를 주었다. 무후는 먼저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후를 폐위시키고 655년에는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무후와 고종 사이에 4남 1녀가 태어났다. 무후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이들은 무후가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던 대신들이었다. 그들이 반대한 주된 이유는 무후가 고관(高官)의 딸이기는 하지만 귀족가문의 태생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들은 또한 무후가 선제(先帝)인 태종의 후궁이었다는 점을 들어 무후와 고종의 관계는 근친상간이 되므로 그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60년이 되어 무후는 반대파를 파직·추방·처형시킴으로써 모두 제거했다. 황족인 고종의 숙부마저 주살했고 그의 일가도 모두 유배당하거나 몰락했다.

고종이 오랫동안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무후가 전권을 장악하여 고종의 병약함을 핑계로 통치를 해나갔다.

천성이 나약했던 고종은 무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고, 고종이 죽기까지 23년 동안 무후가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무후는 모반의 가능성이 있는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나갔고 그 정적이 자신의 피붙이일 때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도전세력이 있을 때 자신을 지원한 사람들 중 인재들을 중용하여 제국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해나갔다. 무후는 뛰어난 행정수완, 용기, 과단성 및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태도 등으로 인하여 궁중 내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은 받지 못했으나 존경은 받았다.

655~675년에 당제국은 무후가 중용하여 승진시킨 군사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태자인 철(哲)이 즉위하여 중종(中宗)이 되었다. 중종은 위씨(韋氏) 가문의 여자를 황후로 삼았는데 위황후는 중종이 선제인 고종만큼이나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무후와 같은 지위로 격상시키려 했다.

한 달 뒤 무후는 중종을 폐위시켜 추방해버리고 둘째 아들인 예왕단(豫王旦)을 즉위시키니 이가 곧 예종(睿宗)이다.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고 실권은 모두 무후의 손에 있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당조 지지세력과 야심만만한 젊은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몇 주 지나지 않아 황실을 지키는 충성스런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무후가 관군을 동원하여 손쉽게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의 규모를 과시하자 무후의 정치적 기반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였다.

6년 뒤인 690년 65세의 무후는 왕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15년 동안 황제로서 통치했다.

이 시기에 황위계승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무후의 친정인 무가(武家)의 조카들은 무후가 이미 국호를 주로 바꾸었으니 이가(李家)의 당조 후계자들을 제치고 무씨의 조카들 중 한 사람에게 황위를 물려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무씨 조카들이나 그 아들 중에는 대중적 인기가 있거나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한편 무후의 친아들인 전 황제 중종과 예종은 지지세력이 없었고, 능력은 더욱 형편없었다.

그러나 무후의 충성스런 측근들 사이에서도 당조를 세운 이가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커져갔다. 698년 무후는 충성스런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유배된 중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책봉했다. 이같은 결단을 내린 것을 보면 무후가 대단한 성품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무후는 황위계승에 있어서 자신의 가문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조카를 후계자로 지목하지도 않았다.

무후는 자신의 가문을 흥성하게 하겠다는 야망은 없이 단지 임종시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진 듯했다. 699년경 말년의 무후는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의 장씨 형제에게 총애를 베풀었다. 이들은 기예(技藝)를 가진 간신들로서 기발한 연회와 수단 좋은 아첨으로 무후의 총애를 받았다.

장씨 형제들은 궁중 사람들과 대신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게 되었고, 이들은 무후에게 장씨 형제의 해악을 경고했다. 무후는 이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병에 걸려 전보다 더 장씨 형제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705년 2월 대신들과 장수들이 모반을 일으켜 궁중을 장악하고 장씨 형제를 처형한 뒤, 늙고 병든 무후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무후는 중종에게 양위한 뒤 다른 궁으로 옮겨가 살다가 705년 12월에 죽었다.

무후는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이 유능한 사람들을 직접 골라서 쓴 탁월한 통치자였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주된 동기였지만 무후가 시행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당대의 중국사회가 군사적·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은, 무후가 추진했던 정책의 결과였다. 무후의 통치정책 중 이러한 측면이 갖는 중대한 의미는 오랫동안 중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가려져왔다. 이들은 무후가 왕위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는 점을 들어 무후의 치적을 과소평가해왔다.

무후는 확고한 기반 위에 새로운 통일제국을 확립했고 필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당조의 안정은 공고하게 되었고 중국 문화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