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집현전

다른 표기 언어 集賢殿

요약 고려와 조선 초기의 시강·학문 연구기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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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치와 기능
  2. 직제와 운영
  3. 성격과 영향

고려 인종대에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연영전을 집현전으로 개칭하고 대학사·학사를 두어 시강을 관장하게 했는데, 그 이전에도 백제의 박사, 신라의 상문사·통문박사·서서원학사 등처럼 그 명칭과 기능이 집현전제와 비슷한 것이 있었다. 집현전은 이후 충렬왕대까지는 그 운영이 불분명하고, 충렬왕 이후에 유명무실해졌다가 충목왕대에 시강을 담당하는 경연제의 설치와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설치와 기능

조선시대인 1399년(정종 1)에 고려의 집현전제를 본떠 집현전을 설치, 교리(校理)·설서(說書)·정자(正字)를 두어 경서를 강론하게 했고, 다음해에 보문각(寶文閣)으로 개칭했다가 폐지했다. 그후 1420년(세종 2)에 왕의 학문진흥에 대한 열망으로 당·송대의 집현전제와 고려 일대의 제관각제(諸館閣制)를 참작하여, 유교주의적 의례·제도의 확립과 대명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한 인재의 양성 및 문풍의 진작을 위해 집현전을 궁궐 안에 다시 두었다.

이 집현전은 이후 세종·문종의 파격적인 우대·육성을 받으면서 1456년(세조 2)에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혁파될 때까지 계속되어 세종대는 물론 조선 초기 유교주의국가 정립의 토대를 제공했다.

집현전의 법제적인 기능은 성립 당시 학문연구기관으로서 도서의 수장과 이용, 학문활동,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것이었으며, 이 기능은 혁파될 때까지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세종 초기·중기에는 법제적인 기능이 중심이었다가, 세종 후기 이후에 법제적인 기능은 물론, 국가시책의 논의에 참여하고 간쟁·탄핵 등의 언론활동도 하는 것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의례·제도의 상정을 위한 고제연구는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공동으로 수행했다.

그 특징은 ① 의례·제도의 근본적인 것을 상정하기 위한 것보다 실시할 때 생기는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 많았고, ② 수시로 당면하는 정치적·제도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었으며, ③ 세종의 독단적인 시책강행의 이론제공과 관련된 것 등이었다. 편찬사업도 본격화했는데, 이후 집현전의 혁파 때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조선 초기 여러 문화의 정리·보급의 토대가 되었다. 이때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각종 사서의 편찬과 주해였다. 서적으로는 〈치평요람 治平要覽〉·〈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정관정요주 貞觀政要註〉·〈역대병요 歷代兵要〉·〈고려사〉·〈고려사절요〉·〈태종실록〉·〈세종실록〉 등이 있다. 조선의 정치이념인 유교와 관련하여 유교윤리서인 〈효행록〉·〈삼강행실〉, 유교의례집인 〈오례의주상정 五禮儀註詳定〉·〈세종조상정의주찬록 世宗朝詳定儀註纂錄〉이 편찬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를 주도했고, 그 보급과 관련하여 〈운회언역 韻會諺譯〉·〈용비어천가주해〉·〈훈민정음해례〉·〈동국정운〉·〈사서언해 四書諺解〉 등을 편찬했다. 이같은 집현전의 고제연구와 편찬사업은 세종대와 조선 초기 유교문화 융성의 원동력이 되었다. 1442년(세종 24) 이후 왕권의 약화로 집현전은 본래의 학문연구기관에서 언론·정치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집현전의 언론·정치 기능의 발휘는 문종·단종대(1451~55)에 집정대신과 대립하기도 하고, 세조초에는 전제왕권을 도모하는 세조와 충돌해 마침내 집현전이 중심이 된 단종복위의 좌절로 혁파되었다.

직제와 운영

경복궁 수정전
경복궁 수정전

집현전의 직제는 성립 당시 영전사(2명, 정1품 겸)·대제학·제학(2명, 종2품 겸)·부제학(1명, 정3품 당상)·직제학(1명, 종3품)·직전(1명, 정4품)·응교(1명, 종4품)·교리(1명, 정5품)·부교리(1명, 종5품)·수찬(1명, 정6품)·부수찬(1명, 종6품)·박사(1명, 정7품)·저작(1명, 정8품)·정자(1명, 정9품)였으며, 그외에 약간 명의 서리가 배속되어 행정 말단의 실무를 담당했다.

집현전의 운영은 영사·대제학·제학이 부제학 이하의 의망 및 부제학 이하가 언론활동의 전개 등과 관련하여 국왕과 대립했을 때 양자를 중개하는 역할 등을 수행했으며, 부제학 이하는 학문연구, 편찬사업, 정책논의의 참여, 언론활동 등 제 업무에 종사했다. 이들 활동은 개인적으로 수행되기도 했지만, 여러 명이 공동으로 또는 집현전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특히 언론활동에 있어서는 현안이나 중대사가 있을 때 또는 국왕이 그들과 대간의 언론을 수용하지 않을 때, 대간과 함께 또는 사헌부·사간원과 합사로서 수행했다. 또 대간이 언론활동과 관련되어 사직했을 때 이들 대신 계속해서 언론을 행했다. 그리고 부제학은 최고의 녹관으로서 집현전의 실무를 지휘했고, 그 지위와 기능 때문에 행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성격과 영향

집현전관은 겸관이나 전임관 모두 당대의 일류학자로서 제수되었다. 특히 부제학 이하에 결원이 생기면 차하위 관원이 차례로 승진하는 차차천전(次次遷轉)에 의하여 충원되고 최하위의 관원만을 신규로 제수했는데, 이 관원에는 집현전당상·이조·의정부가 나이 어린 문사로서 재행이 뛰어난 인물을 의논하여 천망(薦望)하는 절차를 거쳐 제수했다. 집현전관은 일단 제수된 뒤 다른 관아로 체직됨이 없이 차례로 승진하여 직제학·부제학에 이르렀고, 그뒤에 육조·승정원 등으로 진출했다.

또 집현전학사는 그 본연의 목적과 관련되어 부제학 이하 모두가 조회시에는 해당 품계의 관직에서 가장 앞 반열에 서는 본품행두(本品行頭)의 우대를 받았고, 집현전에 소장된 각종 서적을 자유롭게 이용했으며, 휴가를 받아 조용한 사찰에서 집중적으로 독서·연구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국왕이나 왕세자가 주야를 가리지 않고 불시에 집현전을 방문하여 학자들을 장려하는가 하면, 신간도서의 사급, 각종 기호품과 주찬 등의 사물이 그치지 않는 등 우대와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와 우대에도 불구하고 승자·체직과 정치참여에 있어서 의정부·육조 관원에 미치지 못했고, 집현전에서 익힌 정치이론을 실제정치에 응용해보기 위해 육조나 대간직으로 진출하기를 희망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그러나 정치논의의 참여, 언론기능은 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의 기능과 상충되거나 보완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세종 말기 이후 집현전 관리들은 당시 왕권의 침체를 계기로 국정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집정대신에 대해 비판적이고 대립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것과 이후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종복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종복위의 실패로 관아 자체가 혁파되고 말았다.

집현전은 비록 40여 년의 단기간에 걸쳐 존속한 기관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세종이 의도한 인재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을 이룩했다. 비록 1456년(세조 2)에 집현전은 혁파되었으나 그 출신학자들이 세조에서 성종대에 실직·요직에 재임하면서 〈경국대전〉에 집약된 유교 문화·문물을 정리·대성했고, 집현전 재직중에 쌓은 정치이론을 현실에 구현하는 등 선정의 토대가 되었다. 또 1478년(성종 9)에 등장하여 조선말까지 학문연구·시강을 전담한 홍문관제는 집현전의 후신인 만큼 궁극적으로는 집현전 제도가 연장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집현전은 조선 일대를 통하여 유교 문화·문물의 기반인 인재양성과 문풍의 진작에 절대적으로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