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멘스

지멘스

다른 표기 언어 Sir (Charles) William Siemens
요약 테이블
출생 1823. 4. 4, 프로이센 렌테
사망 1883. 11. 19, 런던
국적 독일/영국

요약 지멘스는 강철산업과 전신산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기공학자로 전신산업 발전에 공헌한 베르너 지멘스의 동생이다. 기술학교에서 3년간 공부했고 증기기관 제작공장에서 도제 겸 학생으로 일했다. 그는 형의 전기도금기술을 영국 버밍엄의 엘킹턴스 사에 팔았다. 그는 영국이 특허 보호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영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1847년초부터 동생 프리드리히와 함께 배기가스와 함께 유실되는 열을 포착하여 용광로에 공급되는 공기를 가열하는 데 이용함으로써 열효율을 높일 수 있는 축열원리를 산업공정에 적용해보려고 시도하여 평로의 특허를 출연했다. 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유리 제조분야를 시작으로 제강분야까지 파급되었다. 또한 1874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몬테비데오까지 전선을 부설했으며, 1875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직통선을 가설하는 등 전신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지멘스(Sir (Charles) William Siemens)
지멘스(Sir (Charles) William Siemens)

강철산업과 전신산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멘스는 집에서 개인교수를 받다가 작은아버지의 은행에 들어가기 위해 뤼베크에 있는 한 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의 형 베르너 지멘스는 공학기술 계통이 그의 적성에 더 잘 맞는다고 보고 그를 마크데부르크에 있는 기술학교로 보내 3년간 공부하게 했다. 이어서 그는 작은아버지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그의 매형이 화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괴팅겐대학교에서 1년간 화학·물리학·수학을 공부했다. 그후 그는 형의 권고에 따라 마크데부르크에 있는 증기기관 제작공장에서 무보수로 도제 겸 학생으로 일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형의 전기도금기술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함부르크에서 어느 정도 뜻한 바를 이룬 뒤 1843년 3월 수중에 몇 파운드의 돈만 지닌 채 영국으로 갔다. 그는 전기도금기술을 버밍엄의 엘킹턴스사(社)에 1,600파운드를 받고 팔았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공부를 끝마친 뒤 몇 가지 발명품들을 팔 생각으로 1844년 2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의 특허법이 발명가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발명가로서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생계 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851년에 발명한 수량계(水量計)로 많은 액수의 특허사용료를 받으면서 비로소 생활의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그는 런던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켄징턴에 집도 구입했다. 1859년 글래스고대학교 공학교수의 누이인 앤 고든과 결혼하기 전 그는 그 집에서 동생 카를(1829~1906),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1826~1904)와 함께 살았다.

그해에 그는 영국 시민권을 얻었다.

1847년초부터 그는 동생 프리드리히와 배기 가스와 함께 유실되는 열을 포착하여 용광로에 공급되는 공기를 가열하는 데 이용함으로써 열효율을 높일 수 있는 축열원리(蓄熱原理)를 산업공정에 적용해보려고 시도했다. 1861년 그는 질 낮은 석탄이 용광로 밖으로 배출하는 가스를 이용하여 용광로를 가열해주는 평로(平爐)의 특허에 이 원리를 적용했다.

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맨 처음 이용된 곳은 유리제조 분야였으며, 곧이어 제강(製鋼) 분야에 널리 파급되었고 결국 1856년에 도입된 베서머법을 완전히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업적들을 인정받아 1860년 토목기사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1862년에는 영국왕립학회의 정식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69년 그는 특허사용료에 의한 수익뿐만 아니라 사업을 벌여 더 많은 수익을 얻으려고 사우스웨일스의 랜도어에 제강공장을 차려 직접 경영했다.

몇 년 간은 사업이 번창했으나 1880년대에는 큰 적자를 보았다.

한편 그는 전신(電信)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었고 돈도 벌었다. 1850년초부터 그는 그의 형 베르너의 회사인 베를린의 지멘스운트할스케사(社)의 영국 지사장을 맡았으며, 이러한 관계는 1858년 같은 이름으로 런던에 회사를 별도로 설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공동 경영한 이 회사에서는 전선회사를 위해 전기 테스트를 해주고, 전기장치들을 제작했다.

1874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몬테비데오까지 전선을 부설했으며, 1875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직통선을 가설했다(지멘스운트할스케전신건설회사). 그후 전기조명, 전기철도 분야에도 손을 댔다. 그는 종전의 아크 등보다 훨씬 더 성능이 뛰어난 아크 등을 개발했으며, 영국박물관을 비롯한 몇 군데에 이것들을 가설했다. 죽기 몇 개월 전 그는 북아일랜드에 포트러시 전기철도를 부설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전문직업인으로서 최대한 충실했다. 그는 영국과학진흥협회를 비롯하여 여러 전문기관의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많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러 나라에서 훈장을 받았다. 그는 죽던 해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큰 재산을 남겼으나 자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