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영언

청구영언

다른 표기 언어 靑丘永言

요약 1728년에 편찬된 가장 오래된 대표적 시조집으로 후대의 가집편찬에 영향을 끼쳤다. 정윤경의 서, 악조별 6수, 여말 6수, 조선왕조 203수, 열성어제 5수, 여항 6인의 65수, 규수 3인의 5수 등 580수의 시조를 실었다. 이어 김천택의 발과 마악노초의 후발이 실려 있다.
시조를 작가와 시대별로 배열했고 작자가 있는 것을 먼저, 다음에 무명씨 작품을 배열했다.
육당본은 원본을 증보한 것으로 총 999수의 시조를 실었는데 시조를 악조별로 분류·편찬했다. 26항목으로 악조를 분류했는데 이 책에서 다룬 시조의 악조는 25곡목이다. 체재상 발문이 권두에 있으며 진본에 없는 가사 16편이 권말에 수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시조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대표적 시조집으로 후대의 가집편찬에 영향을 끼쳤다. 1728년(영조 4)에 편찬했다. 우리의 가사들이 구두송영(口頭誦詠)에 그치다가 없어져버리는 것을 애석해하고 개탄한 나머지 전해오는 작품들을 수집하고 틀린 점은 고쳐서 편찬했다.

청구영언 원본
청구영언 원본

정윤경은 서(序)에서 가(歌)와 시(詩)가 우열을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문학을 숭상하고 음악을 소홀히 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김천택은 당대 탁월한 가객으로 성율문예(聲律文藝)에 능하여 시조집을 편찬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청구영언〉은 여러 종의 이본이 전해온다. 그 가운데 진본(珍本)은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고 완비된 체제를 지녀 원본이라 추정된다. 정윤경의 서에 이어 악조별 6수, 여말(麗末) 6수, 조선왕조 203수, 열성어제(列聖御製) 5수, 여항(閭巷) 6인의 65수, 규수(閨秀) 3인의 5수, 연대흠고(年代欠考) 3인의 3수, 무명씨의 104수, 삼삭대엽(三數大葉) 55수, 낙시조(樂時調) 10수, 〈장진주사 將進酒辭〉·〈맹상군가 孟嘗君歌〉·〈만횡청류 蔓橫淸類〉 116수 등 580수의 시조를 실었다. 이어 김천택의 발과 마악노초(磨嶽老樵)의 후발(後跋)을 실었다. 대체로 시조를 작가와 시대별로 배열했고 작자가 있는 것을 먼저, 다음에 무명씨 작품을 배열했다. 필사본은 현재 통문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1948년에 조선진서간행회에서 활자로 간행했다.

육당본(六堂本)은 원본을 증보한 것으로 총 999수의 시조를 실었다. 김천택이 증보한 것이라고 보는 설과 헌종연간에 후인(後人)이 증보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있어 편찬시기가 확실하지 않다. 이 이본은 시조를 악조별로 분류·편찬한 것이 특징이다.

26항목으로 악조를 분류했는데 한 항목에 여러 악조가 든 것과 중복된 항목을 합쳐 계산하면 이 책에서 다룬 시조의 악조는 25곡목이다. 체재상 발문이 권두에 있으며 진본에 없는 가사 16편이 권말에 수록되어 있다. 장형시조가 309수나 되며 진본에는 무명씨 작으로 되어 있는 것이 유명씨 작으로 된 것보다 많다. 경성제국대학에서 1930년에, 조선문고본으로 1939년에, 통문관 신문고본으로 1946년에 출간되었다. 연민본(淵民本)은 이한진(李漢鎭:1732~?)이 1815년경에 친히 필사한 자필본(自筆本) 가집이다. 육당본의 초략본(抄略本)으로 추정되는데 257수의 시조를 수록했다. 다른 이본처럼 곡조나 작가에 의해 분류하지 않았는데 작자명과 작품의 표기에 오류가 많이 보인다. 다른 이본에 있는 서·후발·목록 등은 결여되어 있으나 다른 가집에 없는 작품 12수가 실려 있다. 1961년 한국어문학회(韓國語文學會)에서 영인·출간했다. 이 세 이본 이외에도 가람본Ⅰ·가람본Ⅱ 〈청구영언 靑丘詠言〉, 홍재휴 본 〈청구영언 靑邱永言〉, 이희승본, 등정추부(藤井秋夫)본 〈청구영언 靑丘咏言〉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