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선

채동선

다른 표기 언어 蔡東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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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1. 6. 11, 전남 보성
사망 1953. 2. 2, 부산
국적 한국

요약 한국의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가. 가곡 <고향>, <향수> 등의 작곡가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독일 슈테르헨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으며,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 <새야새야>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1933년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고향>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작곡가. 호는 산남(山南). 부호 채중현의 아들로 순천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에 입학해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공부했으며 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 슈테르헨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다.

1933년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였는데 그의 동생인 소프라노 선엽의 독창회에서 처음 발표되어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1937년 작곡발표회를 갖고 작곡집도 펴냈다.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했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육자배기〉·〈춘향가〉 등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새야새야〉·〈뱃노래〉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8·15해방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협회장에 취임했고 문필가협회 부사장, 국립국악원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으며, 고려합창협회를 조직하여 합창 지휘도 했다. 정지용의 월북으로 1950년대 이후 가곡 <고향>의 가사 사용이 금지되자, 박화목의 시 <망향>과 이은상의 시 <그리워>를 같은 곡에 붙여 불렀던 까닭에, 한 곡이 세 개의 가곡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8년 월북문인 해금에 따라 정지용의 문학작품에 대한 규제도 풀리면서 <고향>도 채동선의 대표작으로 복원되었다.

해방 후 한때 경기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2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이듬해 부산 피난중 급성복막염으로 죽었다. 1983년 '채동선 기념사업회'가 그의 부인 이소란과 평론가 박용구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1984년 '채동선 음악상'을 제정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모음곡, 교성곡 〈한강〉, 진혼곡 〈조선〉·〈조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