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창덕궁

다른 표기 언어 昌德宮

요약 사적 제122호.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1405년(태종 5)에 지어져 광해군 때부터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화재로 몇 차례 중건과정을 거쳤고 일제강점기에 변형을 거쳤다.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이고 궁궐 내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은 양쪽의 월랑이 'ㄷ'로 감싸고 있다. 마당 안에는 임금이 걷는 길이 있고, 북쪽 끝 중앙 월대 위에는 인정전이 자리한다. 인정전의 동북쪽에는 편전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창덕궁의 북쪽 터에는 금원이라 부르던 후원이 있다.
창덕궁에 있는 인정전·돈화문·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선원전 등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차

접기
  1. 창덕궁 인정전
  2. 대조전
  3. 선정전
  4. 창덕궁 후원
  5. 부용정
창덕궁
창덕궁

사적 제122호. 1405년(태종 5)에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인정전(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며, 특히 1833년(순조 33)의 큰 화재 때 대조전과 희정당(熙政堂)이 불탔으나 곧 다시 중건되었다.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복구했다.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인 곳에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과 그 양옆에 월랑(月廊)이 있다.

인정문은 정전의 정문이며 그 양쪽에 있는 월랑은 'ㄷ'자형으로 인정전을 감싸고 있다.

ㄷ자형의 마당 안에는 인정문으로부터 시작된 어도(御道)가 있고, 그 북쪽 끝에 있는 중앙의 높은 월대 위에는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인정전 월랑의 동북쪽에는 편전(便殿)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선정전의 주위에는 여러 행각이 있는데, 그 남쪽에 있던 여러 칸의 행각들은 일본인들이 모두 헐어버렸고, 뒤쪽에 있는 행각만 남아 있다. 동북쪽에는 희정당과 내전인 대조전 영역이 서남향으로 지세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궁궐지〉에 희정당은 편전으로, 또 〈동궐도〉에는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모습과 다르다. 희정당으로부터 구름다리 모양의 행각이 북쪽으로 뻗어 희정당 자리보다 높게 자리잡은 대조전은 침전으로 장방형의 행각이 둘러싸고 있고, 이 뒤쪽으로는 아름다운 후정이 조성되어 있다. 대조전 영역의 동남쪽에 내의원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낙선재(樂善齋), 승화루(承華樓), 백칸 안쪽에 이르는 행각들만 남아 있다.

창덕궁의 북쪽에 있는 넓은 터에는 금원이라고 부르던 후원이 있다.

현재 이 궁궐 안에는 건물 13동과 후원의 건물 28동 등 모두 41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인정전(국보 제225호)·돈화문(敦化門:보물 제385호)·인정문(보물 제813호)·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희정당(보물 제815호)·대조전(보물 제816호)·선원전(璿源殿:보물 제817호) 등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인정전

국보(1985.01.08 지정). 평면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중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10년에 중건했고, 1803년(순조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덕궁
창덕궁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 기단을 쌓고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놓은 다포식 건물이다. 바닥은 쪽마루이나 원래는 전을 깔아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며, 순종 때 서양식 건축의 실내양식이 들어오면서 서양식의 커튼박스·전등시설·전등갓 등으로 장식되었다. 평면의 중앙 어칸 뒤쪽에는 어좌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 일월오악병풍이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특히 중앙에 보개천장을 만들고 봉황새 1쌍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공포는 외3출목·내4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바깥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구름 모양으로 초각되어 기둥 윗몸에 놓은 운공(雲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층 축부의 중앙과 뒤쪽 중앙에 문짝을 달기 위해 문지방만을 놓았으나 나머지 모든 칸에는 소슬빗꽃살창을 달기 위해 높은 머름을 짜넣었다. 상층에는 교창만을 짜넣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합각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 추녀마루 위에는 잡상을 늘어놓아 장식했다.

특히 용마루에 5개의 이화무늬장[李花紋章]의 장식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일제가 설치한 것이다. 인정전과 인정문 사이의 공간에는 중앙이 높고 양쪽이 낮은 어도가 있고, 그 좌우에 18품의 품계석이 있으며 마당에는 넓고 얇은 돌을 깔아 마무리했다.

대조전

보물 제816호.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반정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에 다시 지었고, 1833년에 또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창덕궁의 대조전
창덕궁의 대조전

191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자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수천 칸 전각들을 헐어낸 재목으로 대조전과 그 일곽을 복원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중건으로 〈동궐도〉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중앙에 높은 돌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솟을대문이 있고, 그 좌우로 행각을 둘러 대조전 몸체를 'ㅁ'자형으로 감싸고 있다. 대조전은 대문과 마주하는 곳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월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월대와 대문 사이에는 어도가 있고 월대 네 귀에는 드무(무쇠로 만든 솥)가 있는데 물을 담아 방화용수로 사용했다. 대조전은 앞면 9칸, 옆면 4칸으로 중앙 3칸이 대청이고, 좌우에는 온돌방이 있다.

외부로 노출된 기둥은 네모기둥이고, 안쪽에 있는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기둥 윗몸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두었는데 수서의 끝은 날카롭고,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화반과 운공들을 두어 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안쪽의 고주 위에 8각형 주두를 놓은 것이 이채롭고, 대들보 위는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현재 대청은 쪽마루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를 가설하지 않아 내전임을 나타냈다.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한 다음 용두와 잡상으로 장식했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행각을 두어 경훈각과 연결했으며, 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석단들을 두고 그 위쪽으로 담장을 쌓아 아름다운 후정을 조성했다. 특히 검은색 벽돌과 붉은색 벽돌로 무늬를 놓은 굴뚝이 석단 위에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선정전

보물 제814호.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이다. 창덕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으나 인조반정 때 소실되어 1647년에 중건했다. 장대석을 바른층쌓기한 한 단의 월대 위에 넓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을 만들고 다듬은 초석들을 놓은 다음 그위에 12개의 평주와 2개의 고주를 세웠다.

기둥과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식 구조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내4출목으로 살미의 끝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지만, 삼제공과 사제공 끝은 운형으로 초각되어 있다. 가구는 전면에 세운 2개의 고주와 뒤쪽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위는 우물천장으로 가렸다. 바닥에는 현재 카펫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본래 전바닥이었던 것을 일제가 변형시킨 것이다.

어칸 뒤쪽으로 가는 2개의 기둥을 세워 벽체를 만든 다음 어좌와 일월오악병풍을 두었으며, 그 위쪽은 보개천장으로 꾸몄다. 축부의 중앙 어칸에는 띠살문짝을 달았고, 나머지 칸에는 높은 머름을 두고 그 위쪽으로 띠살창호를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성을 하지 않은 채 치미와 용두를 얹어놓았다.

창덕궁 후원

본래 창덕궁의 후원으로 후원(後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이라고 불렀으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다. 〈태종실록〉에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원은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459년(세조 5)에는 후원 좌우에 연못을 만들고, 열무정(閱武亭)을 세웠다.

창덕궁의 연경당
창덕궁의 연경당

1463년에는 후원을 확장하여 경계가 거의 성균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과 함께 후원도 불타버렸으나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이때의 모습이 왕조실록의 주해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이한 화초와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의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다"라고 했다. 1636년(인조 14)에 지금의 소요정(逍遙亭)인 탄서정(歎逝亭), 태극정(太極亭)인 운영정(雲影亭), 청의정(淸漪亭) 등을 세웠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인조의 친필을 바위에 새겨놓았다. 1642년에는 취규정(聚奎亭)을, 1644년에는 뒷날 관덕정인 취미정을, 1645년에는 희우정(喜雨亭)인 취향정(醉香亭)을, 1646년에는 청연각(淸讌閣)인 벽하정(碧荷亭)을, 1647년에는 취승정(聚勝亭)과 관풍정(觀豊亭)을 세웠다. 1688년(숙종 14)에는 청심정(淸心亭)과 빙옥지를, 1690년에는 술성각 옛 자리에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을 세웠다. 1704년에는 대보단을 축조했고, 1707년에는 택수재(澤水齋)를 세웠다. 1776년에는 왕실의 도서를 두는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주합루(宙合樓)라 부르는 중층 누각이며, 그 아래 연못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택수재를 지금의 부용정(芙蓉亭)으로 고쳤다. 1828년(순조 28)에는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후원 안의 개금재 자리에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선원전을 지었다. 후원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주합루·영화당(暎花堂)·사정기비각·서향각(書香閣)·희우정·제월광풍관(薺月光風觀) 등의 건물들이 있는 지역이다. 둘째 영역은 기오헌(寄傲軒)·기두각(奇斗閣)·애련지(愛蓮池)·애련정·연경당이 들어선 지역이다. 셋째 영역은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승재정·폄우사(砭愚榭)가 있는 지역이다. 넷째 영역은 옥류천을 중심으로 취한정(翠寒亭)·소요정·어정(御井)·청의정·태극정이 들어서 있다. 그밖에도 청심정·빙옥지·능허정(陵虛亭) 등이 곳곳에 있다. 후원의 구성은 낮은 야산과 골짜기 그리고 앞에 펼쳐진 편평한 땅 등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인공을 가해 꾸며놓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조원(造苑)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예이다.

부용정

1707년에 지은 택수재를 1792년(정조 16)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했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4칸의 아(亞)자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남쪽 면의 일부가 돌출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다듬은 8각형의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우고, 기둥 위에는 주두와 익공 2개를 놓아 굴도리를 받치고 있는 이익공집이다.

부용정
부용정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자의 기단 남면과 양측면에 계단을 두어 툇마루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정자 북측에 파놓은 넓은 연못[方池]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북쪽 연못에는 정자의 두리기둥 초석들이 물 속에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툇마루에는 아름다운 평난간을 돌렸다. 부용정 앞의 부용지는 네모난 모양이고 연못의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으니 이는 신선들이 논다는 삼신선산의 하나인 방장이나 봉래 또는 영주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연못에는 서북쪽 계곡의 물이 용두로 된 석루조를 채우고 넘치는 물은 연못의 동쪽 돌벽에 있는 출수구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