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창극

다른 표기 언어 唱劇

요약 창극은 20세기 초 판소리가 변해서 만들어진 형식이다. 고수 1인을 동반하여 광대 혼자서 부르던 판소리는 20세기 초에 남창과 여창으로 나누어졌고, 이어서 도창의 주도하에 각각의 배역을 나누어서 부르는 대화창으로 발전했으며, 마침내 각 배역을 맡아 사실적인 연기를 동반하는 창극에 이르렀다.
협률사 무대에서 명창 김창환·강용환을 비롯한 광대들에 의해 1903년 <춘향전>, 1904년 <심청전>이 창극화되었다. 당시 창극이 안고 있었던 최대의 과제는 전래되는 판소리 작품 이상의 새로운 레퍼토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각사 광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극 <최병도타령>은 창작 창극으로 주목된다. 일제강점기에 위축되었던 창극은 8·15해방 이후 국악원이 창립되는 등 활기를 찾는다.

20세기초 판소리가 변해서 만들어진 형식이다. 고수 1인을 동반하여 광대 혼자서 부르던 판소리는 20세기초에 남창과 여창으로 나누어졌고, 이어서 도창(導唱)의 주도하에 각각의 배역을 나누어서 부르는 대화창(對話唱)으로 발전했으며, 마침내 각 배역을 맡아 사실적인 연기를 동반하는 창극에 이르렀다. 판소리에서 창극으로 전환하게 된 내적인 계기로는 판소리 본래의 극적인 성격과 발림을 들 수 있고, 외적인 계기로는 근대적 극장인 원각사의 설립과 당시 서울에 들어와 있던 청국 창희(唱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고종황제 등극 40주년 축하예식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집된 광대예인들로 구성된 궁내부 관할의 협률사(協律司)가 연희단체 협률사(協律社:1902~06)로 변모한 뒤 다시 이인직의 주도하에 원각사(圓覺社:1908~09)라는 연희단체로 재조직되었다. 협률사 무대에서 명창 김창환·강용환을 비롯한 광대들에 의해 1903년 〈춘향전〉, 1904년 〈심청전〉이 창극화되었다. 이 시기의 창극은 대화창에서 조금 더 나아간 초보적인 형태였다.

당시 창극이 안고 있었던 최대의 과제는 전래되는 판소리 작품 이상의 새로운 레퍼토리가 없다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창극을 판소리와 다른 새 시대의 '새로운' 양식으로 정립해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각사 광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극 〈최병도타령〉(1908)은 최초의 창작 창극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수구파 봉건관료의 학정에 대항하는 개화파 요호부민층이 처참하게 몰락한다는 실화(實話) '최병도사건'을 '위로부터의 개혁'만을 신뢰하는 개화파적 시각에 따라 비극적으로 해석해냈다.

이러한 〈최병도타령〉의 세계관은 광대들의 사상과 일치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이 작품의 성과는 창극운동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지 못한 채 이를 소설로 담아낸 이인직의 신소설 〈은세계〉에 의해 소설사상의 성취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한일합병 이후의 창극은 신파극의 영향을 받아 무대장치가 화려해지고 등장인물의 연기에 신파조가 섞여들어가는 등의 변화를 보이기도 했으나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이하지 못한 채 근근히 명맥만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33년 송만갑·이동백·정정렬 등 당대 최고의 명창 40여 명이 이끄는 조선성악연구회와 전속극단 창극좌가 탄생된 이래 화랑창극단·동일창극단·반도창극단·조선창극단 등의 창극단이 줄을 이어 등장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막바지에 이르던 1940년대의 암흑기를 맞아 다시 크게 위축되었다.

8·15해방 이후 새롭게 활기를 되찾은 창극계에서는 1945년 10월 국악원이 창립되고 이어 국극사·김연수창극단·조선창극단·여성국악동호회 등 수많은 창극단체가 속속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