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

차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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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4, 서울
사망 1979. 10. 26,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이래 1978년까지 4선의원을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된 후 월권행위로 대통령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와의 마찰이 잦았다.
공수부대의 대위였던 그는 5·16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장군의 경호장교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1962년 예편한 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국회에 진출하여 경기도 이천·광주 선거구에서 1978년까지 4선의원이 되었다. 35세이던 1969년 국회 외무위원회 최연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다. 1974년 8월에 경호실장이 되었고, 재야와 야당문제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대응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사태가 나자 군 명령계통을 무시하고 공수단투입을 명령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1979년 10월 26일 피격당해 죽었다.

차지철(車智澈)
차지철(車智澈)

1953년 사병으로 입대하여, 공수부대의 대위였던 그는 5·16군사정변 당시 박치옥 공수단장의 소개로 박정희 장군의 경호장교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1962년 예편하여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이래 경기도 이천·광주 선거구에서 1978년까지 4선의원이 되었다. 35세이던 1969년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의정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을 계기로 경호실장 박종규가 인책되자 그 후임으로 경호실장이 되었다.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월권 행위로 대통령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와의 마찰이 잦았다.

재야와 야당문제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대응했으며,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을 주도하고 1979년 10월 16일 부마사태가 나자 군 명령계통을 무시하고 공수단투입을 명령하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전횡으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1979년 10월 26일 피격당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