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토지당

자유토지당

다른 표기 언어 Free-Soil Party

요약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등장한 영향력 있던 소규모 정당(1848~54).

노예제가 서부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에 반대했다. 노예제 지지세력이 연방정부 내에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펜실베이니아 출신 공화당 하원의원 데이비드 윌멋은 멕시코로부터 새로이 획득한 광대한 남서부지역에 노예제도 금지를 주장한 유명한 윌멋 안건을 1846년 의회에 제출했다.

윌멋의 구상은 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자유토지당의 직접적인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노예제에 대한 휘그당의 어정쩡한 태도에 실망한 '양심적인' 휘그당 당원들은 1848년 8월 버펄로에서 회합을 가졌다. 여기서 이들은 반버너파(→ 헝커파와 반버너파)로 알려진 뉴욕 민주당 내의 노예제 반대파 및 자유당에서 온 17개주의 대표들과 합류하여 자유토지당을 창당했다. "자유로운 토지, 자유로운 언론, 자유로운 노동,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자유토지당의 역사적인 슬로건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848년 자유토지당은 전직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11월에 열린 일반투표에서 자유토지당은 10%의 표밖에 얻지 못했지만 뉴욕에서 민주당 후보의 표를 잠식해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다. 존 P. 헤일이 후보로 나선 1852년에는 득표율이 5%로 줄었다. 그러나 10여 명의 자유토지당 의원들은 뒤에 하원의 세력균형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자유토지당 당원들은 몇몇 주의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854년 해체되어 새로 창립된 공화당에 흡수되었는데, 공화당은 노예제 확산에 반대했던 자유토지당의 이념을 계승하면서 더 나아가 노예제를 도덕적 죄악으로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