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

임춘

다른 표기 언어 林椿 동의어 기지, 耆之, 서하, 西河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고려, 한국

요약 주기사상을 바탕으로 기질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문장론을 주장했다. 고사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아름답게 수식하는 변려문을 많이 남겼다. 문집으로 〈서하집〉이 있으며, 한국 가전문학의 선구적 작품인 〈국순전〉·〈공방전〉을 남겼다.

고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고려 건국공신의 자손으로 할아버지 중간(仲幹)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충경(忠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 광비(光庇)와 큰아버지 종비(宗庇)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지내 구귀족사회에서 일정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큰아버지 종비 아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청년기부터 문명을 날리며 귀족자제다운 삶을 누렸다. 나이 20세를 전후한 1170년(의종 24)에 무인란이 일어나자 그의 삶은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다. 1차 대살륙 때 일가가 화를 당하여 조상대대의 공음전조차 일개 병사에게 빼앗겼다. 개경에서 5년 정도 숨어 지내면서 출사(出仕)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친지들로부터도 경원당하자 살아남은 가속을 이끌고 영남 상주의 개령으로 옮겨가 7년여의 유락생활(流落生活)을 했다. 남아 있는 그의 글 중 많은 부분이 이 당시에 씌어진 것인데 대부분 실의와 고뇌에 찬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것들이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아는 인사들을 통해 여러 번 자천(自薦)을 시도하여 정권에 편입하려 했다. 1180, 1183년에 절친한 친구였던 이인로와 오세재가 연이어 과거에 합격했는데 이때쯤 개경으로 다시 올라와 과거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실의와 곤궁 속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했다. 이인로가 그의 문집 서문에 쓴 것에 의하면 "청춘삼십 백의영몰"(靑春三十白衣永沒)이라 하여 30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가 남긴 글 가운데 "나이 40에 양귀밑털이 다 희어졌다"는 말이 있어 1152년에 태어난 이인로와 동년배인 듯하다. 따라서 그는 30대 후반에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인로·오세재 등과 더불어 죽림고회(竹林高會)에 나가 술을 벗하며 문학을 논하여 고려 중기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주기사상(主氣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기질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문장론을 주장했다. 고사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아름답게 수식하는 변려문을 많이 남겼으나 속으로는 한유(韓愈)가 주장했던 고문운동에 찬동하여, 〈답영사서 答靈師書〉에서 명유라고 했던 사람은 모두 당·송대의 고문가였다. 김부식 이래로 소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당시 문풍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문집으로 〈서하집〉이 있으며, 한국 가전문학의 선구적 작품인 〈국순전 麴醇傳〉·〈공방전 孔方傳〉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