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법

일본법

다른 표기 언어 Japanese law , 日本法

요약 일본에서 일본 고유의 문화적·법률적 전통과 서양의 문화적·법률적 전통을 혼합한 결과로 발달한 법 체계.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 일본의 쇄국이 종식되기 전 일본법은 서양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달했다.

당시의 일본법은 사회적 압력에 따른 양쪽 당사자의 화해를 강조했고, 이 압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대가족 및 굳게 단합된 공동체였다.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규정한 준칙은 거의 없었다. 일본에서 서양의 법률가와 가장 비슷한 존재는 법률고문(소송대리) 구실을 한 '구지시'[公事師]였으며 통상 여관의 주인이 맡았다.

근대적 의미의 법률은 놀랄 만큼 적었다.

공식적으로 상업활동을 권장하지 않았던 정적(靜的)인 사회에서는 분명 발달한 법질서를 원하지도 않았고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일본이 갑자기 서양 세계와 관계를 갖게 되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정치 권력을 덴노에게 되돌려주었다. 일본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치외법권적 지위를 끝내고 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정치적·법률적 체제를 구축하려고 애썼다.

서양 법률은 서양 문물의 대량 수입에 포함된 하나의 요소였다.

법률적 문제에서 일본인들은 유럽 대륙, 특히 독일의 법률 체계를 본보기로 삼았다(→ 독일법). 1896년에 공포된 일본 민법전을 기초한 사람들은 프랑스와 스위스의 법률 및 관습법을 비롯한 많은 법률 체계를 검토해 각기 좋은 점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만들어낸 법전은 독일 민법전의 첫번째 초안을 따랐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일본법 체계는 이후에도 최초의 형태에 충실하면서 발전해왔다. 친족과 상속을 다룬 민법 조항은 일본인의 전통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었지만, 이 조항들이 1947년에 개정되면서 일본 민법은 유럽의 대륙법 계열로 완전히 변모했다.

그러나 일본법은 몇 가지 점에서 유럽의 대륙법보다 미국법에 더 가깝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이 미국에 점령되었고, 그후 미국의 법률사상 및 교육과 접하게 된 결과였다. 오늘날 민사사건에서 증인심문은(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미국의 소송 절차를 따르고 있으며 특별한 행정 법원 계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미국의 법률 사상과 일치한다. 노사 관계법 역시 여러 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법 체계는 그 준칙과 관례에서는 관습법인 영미법보다 유럽 대륙의 민법과 더 비슷하다(→ 대륙법). 더욱이 많은 점에서 일본의 법질서는 서양의 모든 법질서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일본에서는 법률이 분쟁을 해결하거나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는 규칙을 만들고 조정하는 데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동차 사고, 불량품에 대한 제조업자의 책임, 남에게 폐를 끼치는 불법 방해와 관련해 일본 법원이 판결을 내린 사례는 서양인들이 보면 놀랄 만큼 적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에 변호사가 매우 적고 법률의 테두리 밖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고집한다는 점이다. 현지 경찰서는 양쪽 당사자가 화해할 여지를 남겨두며 연장자들은 중개자 역할을 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남편과 아내 및 어린 자녀들 이외에 다른 가족 구성원을 포함하는 대가족이 존재한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가족과 같다는 사고방식이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중소기업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다. 비교적 동질적인 일본 사회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무거운 의무가 따르며, 공동체의 압력은 매우 강하다. 일본이 서구화됨에 따라 일본 법률도 서양에서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시골의 농업 경제가 도시의 산업사회로 급속히 바뀜에 따라 일본의 법 개념에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주어온 사회학적 토대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양에서는 법전만 보면 사회가 분쟁을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법전만 보고는 일본 사회가 실제로 분쟁을 어떻게 조정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