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제의 난

이필제의 난

다른 표기 언어

요약 이필제는 자신과 같은 몰락한 양반 출신의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도모했다. 이들은 군현단위를 넘어서서 지방 관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서울까지 진격하고자 했다. 1869년 진천작변은 공주·천안 등지를 중심으로 사람을 모으던 중 밀고로 실패했다. 이후 이필제는 남해거사를 준비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진주작변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투서로 밀고하는 자가 있어 실패했다. 이후 이필제는 영해로 가서 동학교도 이수용을 찾아가 동학교도를 이용한 변란을 계획했다. 1871년 3월 10일 난을 일으켜 관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어 결국 관군의 공격을 피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이필제는 다시 거사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미리 눈치를 챈 조령별장의 수색으로 1871년 8월 2일 체포되었다.

진천작변·진주작변·영해난·조령난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서 실제로 일어난 것은 영해난뿐이었다. 진천작변과 진주작변은 모의 단계에서 밀고로 발각되었고 조령난도 거사 직전에 실패했다.

이필제는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도모했는데, 종래의 농민항쟁과는 유형이 달랐다. 이전에는 군현 단위의 농민이 각 고을의문제를 해결하고자 일으켰다면, 이들은 군현단위를 넘어서서 지방 관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결국은 서울까지 진격하고자 했던 병란이었다. 당시는 봉건 말기의 사회모순이 극도에 달하고, 서구 자본주의 열강이 무력으로 동아시아에 침략해오고 있었다.

또한 1861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北京] 함락 소식이 조선에도 전해져 양이침공의 가능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가오는 전란을 예고하고 이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서 백성을 구원하는 진인의 출현을 예언하는 정감록류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이에 이필제도 자신이 진인임을 자처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았으며, 그에게 호응했던 사람들도 이미 정감록류의 참서·비기를 접했고 직접 거사를 도모하고자 했다.

1869년의 진천작변은 공주·천안·진천 등지를 중심으로 사람을 모으던 중 밀고에 의해 실패했다. 진천작변이 실패한 후 이필제는 거창·합천 등지에서 주성칠·주성필로 이름을 바꾸어 유영렬·성하첨·정만식 등과 1869년 12월 남해거사를 준비하다가 여의치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진주작변을 계획했다. 그리하여 1870년 2월 28일에 덕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곧장 진주로 들어가 읍성을 공략하고 군기를 탈취하기로 했는데 그 계획은 투서로 밀고하는 자가 있어 실패했다. 진주작변의 실패 후에 이필제는 진천작변을 같이 준비했던 김낙균과 함께 영해로 가서 난을 준비했다.

이필제는 전부터 알던 동학교도 이수용을 찾아가 동학교도를 이용하여 변란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당시 최제우의 처형 이후에 최시형은 동학재건 작업에 착수하여 영해·영덕·경주·상주 등지의 교도들과 교류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변란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주장하는 주변 동학교도들의 의견에 반대하던 최시형도 진인임을 내세우는 이필제에게 설득되어 난에 참가할 것을 수락했다. 이후 준비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871년 3월 10일 난을 일으켜 부사를 죽이고 관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주민들의 호응이 없었다. 결국 관군의 공격을 피해 관아를 내놓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도망중에 무리가 흩어지고 관군의 공격을 받아 잡히거나 사살당했다.

그후 몸을 피한 이필제와 김낙균은 조령관 내 초곡에서 전부터 단양을 중심으로 난을 준비하던 정기현과 함께 합세하여 다시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전에 미리 눈치를 챈 조령별장의 수색으로 이필제·정기현 등은 1871년 8월 2일 체포되었으며 이로써 이필제의 난은 막을 내렸다. 이필제의 난은 다른 병란들과 함께 대내외적 위기가 고조되던 현실에 불만을 품은 몰락양반, 빈곤한 지식층의 대응양식의 한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