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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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李容九 동의어 우필, 愚弼, 상옥, 祥玉, 만식, 萬植, 대유, 大有, 해산, 海山
요약 테이블
출생 1868(고종 5), 경북 상주
사망 1912
국적 한말, 한국

요약 구한말의 종교인, 친일 인물. 동학교도로 동학농민혁명에도 참가했으나,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진회 회장을 지냈다. 1890년 동학교단에 들어가 동학농민혁명 때 경기도·강원도·충청도의 교도 수천 명을 거느리고 참가했다. 1904년 손병희의 명에 따라 동학교도를 모아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진보회를 조직했으며, 이후 진보회와 일진회가 합쳐지면서 회장이 되었다. 1906년 손병희가 일진회 해산을 명령했으나 이에 불복, 출교처분을 당하자 시천교를 세우고 교조가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때 고종의 퇴위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1909년에는 〈일진회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한일합병을 주장하는 글을 순종, 이완용, 소네 통감에게 보냈다. 1910년 일진회가 해산명령을 받자 매국행위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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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도로 동학농민혁명에도 참가했으나,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진회 회장을 지내면서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이루어지기 전 미리 이를 주장하여 왜곡된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초명은 우필. 일명 상옥·만식. 자는 대유·해산.

1890년 동학교단에 들어가 최시형(崔時亨) 밑에 있었으며 포교활동에 뛰어나 3년 동안 약 10만 여 명에게 포교했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최시형이 동원령을 내리자 중군통령 손병희(孫秉熙)의 우익장으로 손천민과 함께 경기도·강원도·충청도의 교도 수천 명을 거느리고 참가했다. 부상을 입고 포위되자 군대를 해산하고 이후 약 4년간 도피생활을 하면서 해서지방과 평안도·함경도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1898년 1월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1901년 3월 손병희와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가 귀국하여 손병희를 대신해 국내조직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이해 10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와 이후의 진로를 논의하는 한편 일본을 견학했다. 1904년 9월 귀국하여 손병희의 명에 따라 동학교도를 모아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진보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전쟁중인 일본군을 도와줄 것, 회원의 단발을 실시할 것 등을 알리는 통고문을 각 지방에 배포했다. 진보회는 러일전쟁중 일본군 전략물자 수송을 자원하여 3,000명의 수송인부와 50명의 정찰인원을 제공했고, 군용철도 경의선 부설에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회원 26만 명을 동원함으로써 일본군의 철도건설과 군수품 운반을 원조했다. 같은 해 12월 진보회와 일진회가 합동하게 되자 13부 총회장이 되었다.

1905년 11월에 일진회의 명의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2월에 일진회의 회장이 되었다. 1906년 9월 손병희가 일진회의 지회를 해산할 것을 명령하자, 이에 대항하여 동학교도들을 일진회 산하로 끌어들이려다가 출교처분을 당하자 시천교를 세우고 교조가 되었다. 1907년 5월에는 일진회의 이름으로 정부의 국채보상운동 등 반보호조약운동과 친일행위 탄압 등을 추궁하여 내각의 사퇴를 주장하는 탄핵문을 제출했다. 같은 해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고종의 퇴위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한일신협약과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항일의병이 일어나자 11월 무장조직인 일진회 자위단을 결성하여 의병 탄압에 앞장섰다.

1909년 12월 일본의 배후조종에 따라 일진회 임시총회에서 "한국황실을 영구히 안전하게 할 것, 한국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정부가 직접 정치를 할 것, 통감부를 폐지할 것, 일진회를 제외한 다른 단체는 해산할 것"을 결의, 〈일진회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어 한일합병을 주장하는 글을 순종, 총리대신 이완용, 소네[曾襧荒助] 통감에게 보냈다. 한일합병이 되자 일제로부터 은사금 10만 엔을 받았다.

1910년 9월 일진회가 해산명령을 받고 일제로부터 외면당하자 매국행위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죽은 뒤 일본왕으로부터 훈1등서보장을 받았다. 장남 석규는 사전교를 대동일진회로 개편하고 한일합병 공로자 감사위령제를 거행하는 등 대를 이어 친일행각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