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암

이암

다른 표기 언어 李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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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297(충렬왕 23)
사망 1364(공민왕 13)
국적 고려, 한국

요약 서예에 능하여 특히 당시 유행하던 원나라 조맹부의 송설체의 대가로 꼽혔다.
충혜왕 초기에 밀직대언 겸 감찰집이 되었는데, 충숙왕·충혜왕 부자간의 갈등으로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한 뒤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여 귀양갔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지신사·동지추밀원사·정당문학·첨의평리 등을 지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어 제학 정사도와 함께 정방제도가 되었는데, 관리임명을 공평하게 못한다 하여 밀성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후에 풀려났다. 충목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한 충정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귀국할 때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했다. 그뒤 정방제조로서 추성수의동덕찬화 공신호를 받았으며,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이 되었다. 공민왕 초기에 철원군으로 봉해졌는데, 사직하고 청평산에 들어갔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75년(우왕 1)에 충정왕 묘당에 배향되었다.

본관은 고성. 초명은 군해. 자는 고운, 호는 행촌. 아버지는 철원군 우(瑀)이다. 1313년(충선왕 5) 과거에 급제했으며, 그해 즉위한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 부인(符印)을 맡는 비성교감에 임명되었다. 충혜왕 초기에 밀직대언 겸 감찰집이 되었는데, 충숙왕·충혜왕 부자간의 갈등으로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한 뒤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여 귀양갔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지신사·동지추밀원사·정당문학·첨의평리 등을 지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어 제학 정사도(鄭思度)와 함께 정방제도가 되었는데, 관리임명을 공평하게 못한다 하여 밀성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후에 풀려났다. 충목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한 충정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귀국할 때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했다. 그뒤 정방제조로서 추성수의동덕찬화(推誠守義同德贊化) 공신호를 받았으며,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이 되었다. 공민왕 초기에 철원군으로 봉해졌는데, 사직하고 청평산에 들어갔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 침입 때 서북면도원수로서 군사 2,000명을 인솔하여 출전했으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1361년 홍건적이 수도에 육박하자 남행하는 왕을 호종하고, 전쟁이 끝난 뒤 그 공으로 호종공 1등으로 등록되고 철성부원군으로 봉해지는 동시에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 호를 받았다. 서예에 능하여 특히 당시 유행하던 원나라 조맹부(趙盟頫)의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꼽혔다. 1375년(우왕 1)에 충정왕 묘당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