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보

이세보

다른 표기 언어 李世輔 동의어 경평군 이인응, 慶平君 李寅應경평군 이호, 慶平君 李晧, 이인응, 李寅應, 좌보, 左輔, 산남, 山南
요약 테이블
출생 1832(순조 32), 전북 전주
사망 1895(고종 32)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시조작가. 고시조를 창작한 조선 후기의 마지막 대가 중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시조를 지었으며 경향도 다양하다.

본관은 전주. 자는 좌보(左甫). 능원대군(綾原大君)의 7대손이다. 아버지 단화(端和)와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의 4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1851년(철종 2) 풍계군 당(唐)의 후사가 되어 이름을 호(晧)로 바꾸었고, 철종으로부터 경평군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1857년 동지사로 청(淸)나라에 다녀왔고, 김좌근과 김문근을 비난한 탓으로 안동김씨가의 미움을 받아 작호를 빼앗겼으며, 1860년 신지도에 유배되어 3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고종이 즉위한 해 풀려나서 지종정경·한성판윤·공조판서·판의금부사의 벼슬을 했고,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듣고 통곡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근래에 개인 시조집 〈풍아 風雅〉·〈시가 詩歌〉 등이 발견되어 남긴 작품이 458수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말을 다듬지 않고 쉽게 썼으므로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경우에 맨 마지막 구절을 생략한 것으로 보아 시조창을 전제로 창작했음을 알 수 있다. 시조를 풍류로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사대부의 시조가 관념적인 수사에서 벗어나 현실인식에 대해서도 참신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배생활을 하면서 관리들의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시조와 애정을 주제로 한 시조가 많고, 그밖에 도덕·기행·회고 등을 읊은 작품이 있다. 형식에서도 월령체의 시조를 새롭게 지었다. 시조 창작의 주체가 사대부에서 평민으로 옮겨진 조선 후기에 사대부로서 현실의 다양한 사건을 소재로 하여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는 점이 시조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