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

이벽

다른 표기 언어 李檗 동의어 덕조, 德操, 광암, 曠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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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4(영조 30), 경기 포천
사망 1785(정조 9), 서울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초기 천주교 신자. 젊은시절에는 경학(經學)을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당시 사회와 주자학적 이념의 모순을 깨닫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다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서(西學書)를 탐독하게 되었다. 이 책들에 대한 연구로 천주교의 교리뿐만 아니라 서구의 과학·문명에 대해 깊은 지식을 쌓아 천주교를 수용하는 기반을 다졌다. 남인 학자들과 교유하여 주자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으며, 그 일환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고 포교에 힘써 한국 천주교의 수용에 크게 기여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요한세자이다. 아버지는 부만(溥萬)이다. 그는 남인의 일원으로서 권일신(權日身)·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용 등과 교유했으며, 특히 정약용과는 절친한 사이로 큰 영향을 주었다. 1779년(정조 3) 정약전(丁若銓) 등 기호지방의 남인학자들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새로운 사상과 실학적인 학문을 모색하는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는데, 이때 그는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전했다.

1784년 중국에 가게 된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아올 것을 부탁했고, 그가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다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친분이 있는 학자와 중인 계층의 인물들을 방문하여 천주교를 전도했다. 권철신·정약용·정약전·이윤하(李潤夏) 등 남인학자들과 김범우(金範禹) 등 중인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뒤 한국 최초의 교단조직인 '가성직자계급'(假聖職者階級)을 형성하고 그 지도자가 되어 포교·강학 등 천주교 의식을 거행했다.

1785년 봄에는 수십 명의 양반과 중인이 모인 가운데 설교하는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천주교 모임은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으며, 성균관 유생들의 척사운동(斥邪運動)으로 해산되었다. 그뒤 천주교 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로 유교적 윤리관과 새로운 사상 사이에서 고민하다 죽었다. 이벽의 누이 경주 이씨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부인이었는데, 큰딸 명련은 황사영(黃嗣永)과, 작은딸 소사는 홍재영(黃嗣永)과 혼인했으며, 황사영과 홍재영, 정소사도 천주교 교인으로 박해를 받다가 순교했다.

이벽의 서학사상은 그의 저서인 〈성교요지 聖敎要旨〉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구약성서〉·〈신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漢詩)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이해와 구세관(救世觀)을 표현한 부분이고, 제2부는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한 것이다. 제1부에서는 천주교의 기본 사상인 창조와 원죄, 예수의 일생과 부활, 구세(救世) 등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남인 학자들의 사회에 대한 위기의식과 민중의 정신적·물질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제2부에서는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와 윤리의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유교적인 동양의 윤리와 서학의 윤리가 종합된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우리나라의 천주교 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하여 당시 사회의 지배적 이념에 대항할 수 있는 학문으로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기독교사상과 유교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했으며, 이는 후일 우리나라 천주교의 수용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정약종(丁若鍾)이 지은 고전소설 〈이벽선생몽회록〉에는 이벽의 강학회에서의 공덕과 죽음이 신성시되어 있어 그의 천주교 포교에 대한 기여가 당시의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성교요지〉가 유일한 저작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