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

의천

다른 표기 언어 義天 동의어 의천, 義天, 석후, 釋煦, 후煦, 우세, 祐世, 대각국사, 大覺國師
요약 테이블
출생 1055(문종 9)
사망 1101(숙종 6)
국적 고려, 한국
종교 불교
본관 개성(開城)
시호 대각국사

요약 고려 문종 때 송나라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창해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준 고려의 승려. 속성은 왕씨, 이름은 후, 호는 우세이며 불교전적을 수집하고 화엄학과 천태학의 교리상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송나라에 유학할 것을 결심했다. 송에 머물면서 당시 활동하고 있던 거의 모든 종파의 고승들을 만나 불교에 대해 토론했다. 이후 사신과 함께 귀구해 국왕과 태후의 환영을 받고 흥왕사의 주지가 돼 신편제종교창총록 3권을 간행했다. 1101년에 국사로 책봉됐으며, 책봉된 지 이틀 만에 입적했다.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했다(고려의 불교). 속성은 왕씨(王氏).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주이씨(仁州李氏) 가문 출신의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1065년(문종 19) 난원(爛圓)에게 출가했으며 그해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에 들어가 화엄학을 중심으로 불교경전을 공부했다. 1067년에 최고 승직(僧職)인 승통(僧統)에 올랐으며, 불경에 대한 승려 및 학자들의 저술을 집대성할 것을 맹세했다. 1077년 처음으로 〈화엄경〉과 그에 대한 연구서를 강의했다. 의천은 불교전적을 수집하고 화엄학과 천태학의 교리상의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중국 송나라에 유학할 것을 결심했다. 1084년(선종 1) 1월 유학을 허락해달라고 국왕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듬해 5월에 왕과 태후에게 편지를 남기고 몰래 제자 수개(壽介)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의천(義天)
의천(義天)

7월에 송나라 서울 변경에 들어가 철종(哲宗)을 만나고 계성사(啓聖寺)에 머물렀다. 철종의 추천으로 화엄종 승려 유성(有誠)을 만나 법장(法藏)의 5교판(敎判)과 지자(智者)의 4교판의 차이 점에 대해 문답을 나누었다. 송의 관리 양걸(楊傑)을 안내자로 삼아 지방으로 가서 항저우[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 정원(淨源)에게 화엄·능엄(楞嚴)·원각(圓覺)·기신(起信)과, 법장·지자의 불교에 대해 토론했다.

이어 천태종 승려 종간(從諫)을 만나 천태의 교관을 토론하고, 다시 혜인원(慧因院)에 가서 정원을 만났다. 혜인원에 머물 때 불교전적 7,500여 권을 기증하고 많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결과 원래 선종에 속했던 혜인원이 화엄종으로 바뀌었으며, 이름도 고려사(高麗寺)라 하게 되었다. 곧이어 천태산 지의(智顗)의 탑을 참배하고 본국에 돌아가 천태교학을 선양할 것을 맹세했다.

이와 같이 의천은 송에 머물면서 당시 활동하고 있던 거의 모든 종파의 고승들을 만나 불교에 대하여 토론했다.

의천의 이러한 활발한 교류와 불교전적 수집에 대하여, 당시 관직에 있던 소식(蘇軾)은 몇 차례나 상소문을 올려 비판했지만, 송나라 조정은 오히려 의천을 환대했다. 1086년 5월 본국 사신과 함께 귀국하여 국왕과 태후의 환영을 받고,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었다. 1089년에는 천태종의 본거지가 될 국청사(國淸寺) 공사를 개시했다. 1091년 흥왕사에 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하고 중국·일본·거란 및 국내에서 수집한 전적을 모아 〈속장경 續藏經〉 간행에 착수했으며, 그 예비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간행했다.

1094년 홍원사(洪圓寺) 주지가 되었으나, 그해 5월 헌종이 즉위하고 인주이씨가 집권하자, 인주이씨의 지원을 받은 법상종 교단측이 의천의 천태종 개창을 비판했다. 이에 의천은 해인사(海印寺)에서 은거하다가, 1096년(숙종 1) 친형인 숙종이 인주이씨 세력을 숙청하자 다시 흥왕사로 돌아왔다. 이듬해 국청사가 완성되자 그 주지직을 겸했다. 1101년 10월에 국사(國師)로 책봉되었으며, 책봉된 지 이틀 만에 입적했다.

문도들이 그의 사리를 영통사에 안치했다.

의천의 불교사상은 화엄학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잘 짜여진 하나의 틀을 이루고 있다. 우선 교학면을 보면, 그는 중국 징관(澄觀) 단계의 화엄학을 토대로 하여 법상종(法相宗)의 유식학(唯識學)을 견제하려는 성상겸학(性相兼學)을 주장했다. 또 같은 화엄학 내에서도 고려초 균여(均如)의 주술성을 배격하며 불교적 합리주의를 강조했다.

실천면에서는 (禪)의 수행을 중시했다. 의천은 선을 습선(習禪)과 설선(說禪)으로 나눈 다음, 조계혜능(曹溪慧能) 이래의 선종을 말로만 하는 선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는 대신, 습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그 대상을 천태선에서 찾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화엄학과 천태학의 일치를 증명했는데, 그것이 화엄종 승려이면서 별도로 천태종을 개창하게 된 사상적 이유였다. 천태종 개창은 현실적으로 법상종을 견제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천태종에는 고려초에 들어온 법안종(法眼宗) 계통의 승려가 대거 합류함으로써, 고려의 천태종은 중국과는 달리 선종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천태종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계혜능 이래의 전통적 선종을 고수한 승려들이 자신들을 조계종(曹溪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12세기에 들어가면서 불교계는 교종의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의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재편되었다. 의천의 불교는 귀족적이어서 지방민과 일반민에 대한 종교적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아가 5교판에서 제일 하위인 인승(人乘)에 유교를, 그 위의 천승(天乘)에 도교를, 그리고 그 위의 나머지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菩薩乘)에 불교를 각각 둠으로써, 불교의 우위하에 유교와 도교를 포섭하려는 의식을 보여주었다.

저서에 〈대각국사문집 大覺國師文集〉 23권,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 13권, 〈신집원종문류 新集圓宗文類〉 22권, 〈석원사림 釋苑詞林〉 250권, 〈간정성유식론단과 刊定成唯識論單科〉 3권,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 등이 있으며, 불교사상 최초로 〈속장경〉을 편찬·간행했다.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