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하 레비

유다 하 레비

다른 표기 언어 Judah ha-L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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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75경, 팜플로나 왕국(나바라) 투델라
사망 1141. 7, 이집트
국적 유대

요약 유대의 시인·종교철학자.
히브리어 본명은 Yehuda Ben Shemuel ha-L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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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3. 작품

개요

그의 작품은 아랍 문화권 내에서 발전한 히브리 시의 최고봉을 이룬다.

주요작품으로는 시온 산을 찬양하는 〈시오나이드 Zionide〉 시를 모은 〈디완 Dῑwān〉, 대화형식으로 유대주의에 대한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쿠자리의 서(書) Sefer ha-Kuzari〉가 있다.

생애

유다 하 레비는 스페인 북부의 투델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그의 마을을 비롯한 스페인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는 그리스도교 국토회복운동이 이미 진행중이었다. 1085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정복하여 수도로 삼았고, 스페인의 추앙받는 국가 영웅 시드의 업적도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아주 일찍부터 시적 재능을 보인 그는 어린 시절을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보냈으나 소년기에도 당시 유럽의 주요 문화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이슬람교도가 거주하는 스페인에 끌리는 것을 느꼈다.

1090년이 되기 전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로 가 그곳의 히브리의 시인·지식인들과 교류를 가졌고, 그의 탁월한 재능은 곧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당시 가장 유명한 히브리 시인, 그라나다의 모세 이븐 에즈라는 그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고 이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을 간직하자고 약속했다.

그라나다에서 이븐 에즈라와 함께 즐기며 지낸 기간은 성공과 행복의 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유쾌한 기분을 여러 시 속에 표현했다. 이 즐거운 시절은 1090년, 열광적인 이슬람교 운동을 신봉하던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 신자이며 당시 안달루시아에 이설을 허용치 않는 정통 정부를 수립한 알모라비데족이 그라나다를 기습하자 끝나고 말았다. 유다 하 레비가 알모라비데족이 그라나다 및 여타 지역의 침공을 목격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이 사건은 그의 여생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젊은시절 루세나 등 안달루시아의 다른 유대인 중심지에서 지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루세나는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마을로 유대 신학 연구를 위한 유명한 예시바(아카데미)가 있었다. 이 연구소 소장 이사악 알파시가 1103년 세상을 떠나자 그는 시적인 비문을 지었으며, 후임인 요셉 이븐 미가시와도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그를 위해 편지를 써주기도 했다. 유다 하 레비는 세비야에서도 얼마간 체류했는데, 그곳의 일부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푸대접을 받자 그들의 탐욕과 무식함을 신랄한 풍자시로 비난함으로써 보복했다.

그의 시들로 미루어보면 그는 한때 물질적 고통을 겪었으며 관대한 후원자의 선의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자신의 길을 개척하여 독립하게 되었다. 알모라비드 정권에 실망한 그는 그리스도교 지역인 카스티야로 떠나 수도인 톨레도에 정착했고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유대인에게 개방된 직업 중 하나였던 내과의사로 꾸준히 일했는데, 이 직업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주변 그리스도교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해주었다.

톨레도에 거주하면서 훌륭한 카스티야 유대인들을 위한 찬양시를 지었는데, 특히 성공한 궁정 신하 요셉 이븐 페루지엘을 찬양했다. 그는 내과의사이자 알폰소 6세의 고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스페인 아랍어 별명인 시데유스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유다 하 레비는 잠시 동안 힘든 시험에 처한 자신의 민족운이 카스티야에서 피어나리라고 믿었으나 그의 희망은 계속된 실망으로 깨지고 말았다. 시데유스의 조카로 카스티야에서 활동적으로 봉사하던 솔로몬 이븐 페루지엘은 중요한 임무를 띠고 아라곤에서 톨레도로 돌아오던 도중 1108년 5월 3일 그리스도교도인 스페인 사람들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이 유대인 정치가를 환대하기 위해 매우 정교한 시를 완성했지만 치워버려야 했고, 이 피살자를 위해 죄 많은 그리스도교 정신인 '에돔의 딸'에 대한 저주로 끝나는 공식적인 긴 비가를 지었다. 그밖에도 여러 폭력 행위들이 카스티야의 유대인들에게 저질러졌으며, 더욱더 나쁜 것은 알모라비드 영역과 스페인의 그리스도교 왕국 사이의 충돌에서 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점이었다.

양쪽으로부터의 불신·약탈·살해 등은 마치 망치와 모루 사이에 놓인 듯한 상황이었다. 유다 하 레비는 그들의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임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시에 그려 넣었다. 중세 유대인들은 〈다니엘〉에 언급된 자신들의 구원의 신비한 날짜를 판독해내려고 계속 노력했고, 그것을 자신들의 시대에 적용시키려고 애썼다. 유다 하 레비의 작품 가운데 다니엘을 언급한 예언시에 보면, 1130년 이슬람 제국이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는 말년에 가서야 이슬람교 스페인을 분명히 인정하게 되었고, 쇠퇴기에도 유대 문화의 주요중심지로 남아 있던 코르도바에 살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폭넓게 친분을 가졌고 해외뿐 아니라 스페인의 많은 유명한 동시대인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그럭저럭 어느 정도 풍요를 누리게 되었으며 사랑하는 가족과 몇몇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삶을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점점 더 예루살렘을 여행하고픈 욕구를 느끼면서, 그곳에 대해 운문과 산문으로 장황한 글을 썼다. 〈쿠자리〉의 종결부는 시온에 대한 애착을 이야기하면서 스페인에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지를 찬양하는 많은 시 가운데 〈시오나이드〉(시온에 대한 송시)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가장 널리 번역된 중세 히브리어 시이다.

또한 그의 시는 시오니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뜨거운 논쟁도 담고 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성지순례를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좋은 친구였던 할폰 하 레비 알다미아티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멀리 예멘과 인도까지 무역을 하면서 스페인도 자주 방문하던 매우 부유하며 교육받은 유대계 이집트인이었다. 유다 하 레비는 1140년 스페인을 떠났다.

그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르면, 우선 이집트를 향해 출발한 후 거기서부터 육로를 따라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것이다. 선상에서 지은 바다에 대한 시들은 주제와 분위기에서 모두 히브리 문학에 상당한 혁신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1140년 5월 3일 그가 탄 배가 알렉산드리아 항에 도착하자 성대한 유대식 파티와 함께 환대받았다. 그는 유명한 유대인 내과의사·판사인 아론 이븐 알 암마니의 웅장한 저택에 머물렀다. 그 나라의 많은 저명한 유대인들이 그를 찬미하고 친분을 갖기 위해 찾아왔고, 그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모든 이집트계 유대인들의 나지드(우두머리)인 사무엘 벤 하나니아가 살고 있던 카이로(푸스타트)로 간 그는 그곳에서 더 큰 환영을 받았다. 유다 하 레비는 성서 속의 기적들이 일어났던 이 땅에서 깊은 경외와 겸손을 느끼는 동시에,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아름다움에 일종의 기쁨을 느꼈다. 마치 젊음을 되찾은 듯, 내부에서 창작력이 용솟음쳐 올라 많은 글을 쉽게 써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의 신성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종종 죽음이 자신의 뜻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무엇이 그를 그곳에 있게 하는지 모르지만, 그는 사실상 이집트를 벗어나지 못한 채 1141년 죽었다. 이집트는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으며 그가 시온에 막 도착해서 자신의 유명한 〈시오나이드〉를 암송할 때 적의에 찬 이슬람교도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한참 뒤에 생긴 전설이 그의 죽음을 낭만적으로 장식했다. 이 전설은 널리 퍼졌으며 유명한 두 사람의 19세기 시인들에 의해 자세히 다시 씌어졌는데, 1851년 하인리히 하이네가 독일어로 쓴 〈로만체로 Romanzero〉에, 1869년 미카 요셉 레벤슨이 히브리어로 쓴 〈랍비 예후다 하 레비 Rabbi Yehudah ha-Levi〉에 잘 나타나 있다.

작품

유다 하 레비는 아랍 문학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문학의 요소들을 교묘하게 동화시켰다.

시집 〈디완〉은 세속적인 시와 종교적인 시를 함께 싣고 있는데 모두 시온(이스라엘 땅)에 대한 열정적인 애착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성지의 의미는 유대 민족이 망명생활에서 구원된 후 언젠가 모여살 수 있는 장소라는 것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이주·정착함으로써 메시아의 출현이 앞당겨지리라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그는 중세 선조들 중 아무도 하지 못했던 예루살렘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

또한 8세기에 한 박식한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카자르 왕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아랍 산문작품에서 유대교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상술했는데, 이 작품은 〈쿠자리의 서〉라는 제목의 히브리어로 번역되어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