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키

윌키

다른 표기 언어 Wendell L(ewis) Will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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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2. 2. 18, 미국 인디애나 엘우드
사망 1944. 10. 8, 뉴욕 시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정치가.

1940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국제적 협력을 강조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용어로 유명해졌다. 1916년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법학학위를 받은 그는 아버지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육군에 입대했다.

전후 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일했으며, 1929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코먼웰스앤드서던사(社)의 법률 담당 부서에서 근무했다. 4년 후 이 정력적인 법률가는 거대한 공익사업지주회사 대표가 되었다. 1933년 이후 그는 연방 정부의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와 맞서 경합을 벌인 개인소유 공익사업회사의 지도자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30년대초에는 민주당원이었으나 기업경영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그는 몇 년 후 공화당으로 옮겼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효율적으로 비판한 그는 1940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윌키를 대통령으로'라고 외치는 수백 명의 유권자 모임이 전국에서 생겨났다.

뒤늦은 출발, 제한된 조직력, 당지도부의 반대 등에도 불구하고 그는 6차 결선투표에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목이 쉴 때까지 선거운동을 벌인 그는 기업의 확대와 투자촉진정책을 통해 취업기회를 확대시키고, 유익한 뉴딜 정책 개혁안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연합국에 대한 원조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민주당의 루스벨트 진영은 윌키의 월스트리트 배경과 세계 경제상황 악화를 이용하여 그를 공격했다. 1940년 대통령선거인단 투표에서 윌키는 단지 10개 주에서만 승리했으며 루스벨트가 449명의 대의원을 확보한 반면, 그는 82명만을 확보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얻은 2,200만 명 이상의 지지표는 그당시 공화당이 얻었던 가장 많은 득표수였다. 윌키는 양당체제하에서의 '충실한 야당'의 필요성을 계속적으로 역설했다. 1941년에는 영국, 1942년에는 중동과 소련, 중국을 방문했다. 1942년 그는 20세기폭스영화사의 이사회 회장이 되었다. 대부분 그의 여행 경험을 토대로 집필된 〈하나의 세계 One World〉(1943)는 전후 협력에 대한 강한 호소를 담고 있으며, 또한 공화당원들이 고립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루스벨트의 전쟁수행정책을 지지했던 그의 행적은 그가 1944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재지명되는 데 있어 많은 반대자를 만들었다. 그는 위스콘신 예비선거에서 패배하자 경선에서 사퇴했다. 그의 전기로는 조지프 반스가 쓴 〈윌키 Willkie〉(195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