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

다른 표기 언어 Yuan Shihk'ai , 袁世凱
요약 테이블
출생 1859, 중국 허난 성[河南省]
사망 1916. 6. 6
국적 중국

요약 정치적 격변기를 맞은 중국의 정치가로, 중국 근대화와 국방개혁에 기여했으며, 1912~16년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을 지냈다. 위안스카이는 허난 성 샹청[項城] 지방의 군인 지주가문에서 태어났다. 과거시험의 제일 낮은 단계인 향시(鄕試)에도 합격하지 못했지만, 한족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총독이 되었다. 아무런 학문적 배경도 없이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청말에는 후작으로까지 봉해졌다.
위안스카이는 보수세력이나 혁명세력 모두에게 나라의 분열을 막고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결과 베이징의 청 황실과 난징[南京]의 중화민국 정부 양자가 모두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 취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는 종신 대총통이 되고자 음모를 꾸몄으나, 곧 반대 세력에 밀렸고, 1916년 궁지에 몰려 있던 그는 만성 피로와 요독증(尿毒症)으로 사망했다.

위안 스카이 (Yuan Shihkai)
위안 스카이 (Yuan Shihkai)

자는 웨이팅[慰亭], 호는 룽안[容庵]. 1912~16년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을 지냈다.

위안스카이는 허난 성 샹청[項城] 지방의 군인 지주가문에서 태어났다.

탁월한 재능을 지니기는 했으나 젊었을 때는 학문보다 운동에 더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쾌락을 탐닉했다. 과거시험의 제일 낮은 단계인 향시(鄕試)에도 합격하지 못했지만, 한족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총독이 되었다. 아무런 학문적 배경도 없이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청말에는 후작으로까지 봉해졌다. 그는 이홍장(李鴻章)이 지휘하던 안후이군[安徽軍]에 들어가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 군대는 1882년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선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위기상황들을 헤쳐나가면서 정확한 형세판단과 과감한 결단력과 특히 군사·경제에 있어서의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본국의 상급자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1885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되어 청조를 위해 열심히 일했으나, 결과적으로 청일전쟁(1894~95)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중국의 육군·해군이 일본군에게 패배하자 청나라 조정은 내외 적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말았다.

그결과 새로운 군대의 육성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고 위안스카이에게 이 일이 맡겨졌다. 그의 휘하에 있던 북양군(北洋軍)은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유일한 관군이 되었는데, 이에 따라 그의 정치적 위치도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높아졌다. 1901년 직례성(直隸省)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이 직위에 있으면서, 그리고 후에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중국 근대화와 국방계획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직위를 거치는 동안 계속 서태후(西太后)의 신임과 변함없는 지원을 받았으나, 1908년 서태후가 사망하자 그의 반대자들 특히 어린 황제의 아버지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에 의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은퇴해야만 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물결이 만주족을 위협하자 청조는 그를 소환하여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이 긴박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위안스카이는 보수세력이나 혁명세력 모두에게 나라의 분열을 막고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결과 베이징의 청 황실과 난징[南京]의 중화민국 정부 양자가 모두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 취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당시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각 성은 지방군벌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헌법은 제정중이었다. 그는 새로 구성된 의회가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대규모 해외차관 도입계획이 의회의 반대에 직면하자, 그는 국민당의 당수 대행인 쑹자오런[宋敎仁]을 무자비하게 암살하고 의회의 분열을 책동했다. 그결과 1913년 반(反)위안스카이 폭동이 일어났으나,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고 있던 그는 폭동을 쉽게 진압했다. 그결과 중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실현시키려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뒤 위안스카이는 종신 대총통이 되고자 음모를 꾸몄으며 1915~16년에는 제제(帝制)를 부활시켜 황제가 되려고 했다.

표면상 그의 목표는 중국 내의 모든 세력을 단결시키고 중앙정부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것이었지만, 제제를 부활하려는 시도는 그의 반대파는 물론이고 지지세력인 보수파 관료와 군부 내에서까지도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그의 권위에 도전했으며, 원래 그를 지원하고 있던 서구 열강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그를 지원해줄 여력이 없었다. 사태를 파악한 그는 곧 제제를 철회했으나 반대파는 그에게 총통직에서도 물러나라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1916년 궁지에 몰려 있던 그는 만성 피로와 요독증(尿毒症)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