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필라스

울필라스

다른 표기 언어 Ulfilas
요약 테이블
출생 311경
사망 382경, 콘스탄티노플
국적 고트

요약 고트족을 복음화한 주교·선교사.
고트어로는 Wulfila.

고트족의 문자를 창안했다고 하며, 최초로 게르만어로 성서를 번역했다. 그의 생애를 분명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4, 5세기 교회사가들의 글에는 그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들이 나타난다.

3세기에 고트족에게 포로로 잡혀가 도나우 강 북쪽으로 옮겨져 그곳에 정착한 카파도키아인들의 자손인 것으로 믿어지며, 30세 때 로마 황제에게 대사로 파견된 듯하다. 341년 아리우스주의자( → 아리우스)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고트족 그리스도교도들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리우스). 도나우 강 북쪽의 고트족들 가운데에서 7년간 활동하다가, 고트족 군주의 박해 때문에 아리우스주의자였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승인을 받아 교도들을 이끌고 모이시아(지금의 불가리아에 있음)로 이주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울필라스가 375년경 박해받던 고트족 그리스도교도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피하도록 도와주었다고 전한다.

울필라스는 주교 임명을 받기 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60)에 참석하여 이 회의가 공포한 '유사본질론'(homoiousios) 신조를 받아들였다. 그후 그는 성자와 성부의 유사본질과 성령의 철저한 종속성을 가르쳤다. 그가 비시고트족들에게 전한 것은 이같은 아리우스주의적인 형태의 그리스도교이다.

그는 교회사와 유럽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고트족의 개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379년 니케아 정통신앙의 수호자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 황제가 되었을 때, 울필라스는 '유사본질론'의 입장을 가지고 타협하고 화해하려는 집단을 이끌었음이 분명하다. 아퀼레이아 공의회(381)가 끝난 뒤, 테오도시우스는 토론을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그를 소환했으며, 그 기간에 그는 죽었다.

울필라스는 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개조하여 고트 문자를 창안함으로써 저작활동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게르만적인 그리스도교 용어를 새로 만들었는데, 그중 어떤 용어들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 381년 이전에 그는 성서의 일부를 그리스어에서 고트어로 번역했다.

그가 복음서들과 바울로의 서신들을 고트어로 번역한 것 가운데 상당부분이 현존하며, 〈느헤미야〉 번역서의 일부도 남아 있다. 그가 〈열왕기〉를 제외한 성서 전체를 번역했다고 전해지지만, 어느 정도 번역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의 성서 번역 중 현존하는 자료들은 W. 슈트라이트베르크의 〈고트어 성서 Gotische Bibel〉(1950, 3판)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고트어·그리스어·라틴어로 많은 설교와 성서주석을 썼다고 하며, 현존하는 몇몇 아리우스주의 저작들이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885년에는 C.A.A. 스콧의 〈고트족의 사도 울필라스 Ulfilas, Apostle of the Goths〉가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