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3세

요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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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37. 12. 21, 스웨덴 스테예보리 성
사망 1592. 11. 17, 스톡홀름
국적 스웨덴

요약 스웨덴의 왕(1568~92 재위).
(영). John Ⅲ.

스웨덴의 루터파 교회와 로마의 가톨릭 지도자들을 화해시키고 폐기된 가톨릭 예식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한 신앙심 깊은 지배자였다.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1세 바사와 2번째 부인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난 그는 1556년 아버지로부터 핀란드 공작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왕실과는 독립적으로 외교정책을 추구해 1560년에 스웨덴의 왕이 된 이복 형제 에리크 14세와 갈등을 빚었다. 에리크는 요한의 권위를 제한했고, 요한이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인 카타리나와 결혼해(1562) 폴란드에 기반을 구축하자 1563년 그를 투옥했다.

1567년에 석방된 후 요한은 장차 스웨덴의 카를 9세가 된 동생과 제휴하여 1568년 에리크를 타도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곧 슈체친 조약(1570)에 조인함으로써 덴마크와의 오랜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조약에서 그는, 실제로는 에스토니아에 대한 영유권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공식적으로는 포기했다. 그러나 통치 말년에는 에스토니아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유능한 신학자이기도 했던 요한은 루터교 신학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종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위해 실제로 로마와 스페인에 있는 가톨릭 지도자들과 협상했다. 1577년에 자신이 저술한 예식서인 〈Red Book〉을 소개했는데, 이 책은 스웨덴에서 루터파가 승리하면서 일소해 버린 가톨릭 교회예식의 일부를 부활시켰다. 1580년에 와서 그는 이미 로마와의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동생 카를이 주도하는 반대파에게 〈Red Book〉을 강요하려고 재시도했다.

1586년 요한은 가톨릭교도로 성장한 아들 시기스문드를 공석인 폴란드의 왕에 지명했으나 폴란드인들이 시기스문드를 왕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에스토니아의 반환을 요구하자 시기스문드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국무회의를 좌우했던 스웨덴 귀족들은 반러시아 동맹에 폴란드를 끌어들이고, 통치자가 자리를 비우면 자신들의 권력을 키울 수 있으리라는 계산 아래 시기스문드 옹립을 지지했다. 요한과 그의 종교정책에 반대했던 카를은 귀족들의 야망에 공동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화해했다. 그럼에도 시기스문드는 1587년에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요한은 학식과 교양이 있으며 돈을 잘 쓰면서도 안목있는 예술후원자였지만, 행정과 재정문제에 있어서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웨덴 교회에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관철시키는 데 실패하자 화병으로 죽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