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외젠

다른 표기 언어 Eugene of Sav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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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63. 10. 18, 프랑스 파리
사망 1736. 4. 24, 오스트리아 빈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사부아가(家) 카리냥계(系) 출신의 육군 원수, 정치인.
정식 이름은 Fran대체이미지oisEug대체이미지ne, Prince de Savoie-Carignan(Franz Eugen, Prinz von Savoyen-Carignan).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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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3. 과업

개요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군대에서 복무할 당시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군인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다.

중유럽과 발칸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투르크와 싸웠고(1683~88, 1697, 1715~18), 대동맹 전쟁(1689~97)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에서 프랑스와 싸워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그는 또 프리드리히 대제의 스승이었고, 나폴레옹이 역사상 최고의 7대 전략가들 중에서 후세에도 그의 군사활동을 연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인물로 지목한 사람이었다.

생애

외젠은 사부아카리냥가(家)의 수아송 백작과 추기경 마자랭의 질녀 올림피아 만치니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의 조상들은 사부아 공작들로 나중에 시칠리아 왕, 사르데냐 왕이 되고 종국에는 전이탈리아의 왕이 된 데 비해 어머니 쪽은 이탈리아의 귀족뿐 아니라 모자 제조공, 시종, 미천한 직공들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젊은시절에 연애사건이 있었다는 말이 나돌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실제로 외젠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루이는 극구 이를 부인했다.

어쨌든 그는 자기 혈육이라는 이 불쾌한 소문을 수치스럽게 여겨 지나칠 정도로 외젠의 야망을 견제했다. 이때문에 외젠은 20년간 파리와 베르사유에서 불명예스러운 시절을 보낸 뒤 완전히 프랑스를 떠나, 투르크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던 레오폴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683년 외젠이 최초의 전투에서 투르크에 포위된 빈을 구하고 두각을 나타내자 이듬해 레오폴트 1세는 그에게 용기병 1개 연대의 지휘권을 주었다.

이제는 어느 무엇도 이 젊은 천재가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를 승리로 이끈 것은 비단 그의 뛰어난 전략만이 아니라 그의 부대에 넘치는 활기였다. 그리하여 그는 누차 부하들을 이끌고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군 고위 지휘관으로 승진한 외젠은 29세의 나이에 야전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투를 7번 치렀다.

젠토·페테르바로드·베오그라드에서 승리함으로써 투르크로부터 헝가리를 단번에 모두 지켰고 절친한 친구인 말버러 공작과 함께 블렌하임에서 바이에른과 전독일군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토리노에서 싸워 이겨 북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었다. 또한 오우데나르데와 말플라크 싸움에서 네덜란드를 이겼다. 그는 단지 스페인만을 내주었는데, 이는 황제 카를 6세가 정치적으로 우매했기 때문이었다.

외젠은 그처럼 험악한 시기에 가장 격렬한 교전을 치렀고 극도로 체력을 소모시키는 행군을 감행했으며 어려운 상황에서 내린 결정은 전사(戰史)의 기록 가운데 매우 과감하고 성공적인 것이었다.

24번의 전투에서 군사적 지휘력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것은 바로 그의 지혜였는데, 그는 군사적 승리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로 생각할 만큼 지혜로웠다. 외젠은 정복자였을 뿐 아니라 피정복민들의 보호자였으며 창조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평화를 꽃피워나가도록 노력했다. 39년이라는 생애 동안 외젠은 계속해서 황제군을 이끌고 사베 강에서 롬바르디아로, 티롤 지방을 거쳐 다시 바이에른과 라인 강 연안으로, 투르크에 대항해서 다시 한번 헝가리로, 그리고 다시 플랑드르로 진격했다.

외젠은 13번이나 부상을 당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수많은 적과 싸울 때도 '뿌리깊은 오스트리아의 악습'이라는 보이지 않는 또다른 적과도 싸워야 했다.

외젠은 3명의 황제, 즉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 카를 6세를 섬겼는데 생애 마지막에 가서야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버지이고, 둘째는 형제인 반면, 셋째가 (그렇게 위대한 신하일 경우에) 주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베오그라드 점령(1718)은 외젠이 거둔 가장 유명한 승리였다.

이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 그는 대담하고도 위험한 대형으로 군대를 포진시켰다. 전멸당하지 않으려면 도시의 포위공격을 중지하라고 꾀하면서 4배나 강한 군사력으로 외젠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는 투르크 군대로부터 후퇴하라고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탄원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더구나 외젠의 병사들은 질병으로 10명당 1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지에 머물렀고, 한밤중의 짙은 안개 속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낮에 안개가 걷히자 그는 투르크군을 전멸시켰다.

수많은 포로를 잡고 투르크의 야영지 모두를 장악한 외젠은 순식간에 이 도시를 점령했다.

과업

뛰어난 전과를 쌓은 외젠은 기진맥진하여 1736년에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군사적인 영예에다 과학적·예술적·문학적 관심을 들추어 그를 높이 평가하고자 했다. 비록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서신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의 문학적 관심은 주목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자기 서재에 있던 수만 권의 책(대부분 빈 국가문서고에 보관) 중 어느 것도 여러 번 사용했던 흔적이 없고 외젠이 책읽기를 소홀히 한 이래 200년 이상 전혀 펼쳐지지 않은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과 회화에 대한 그의 관심에 대해 말하자면,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그의 궁전을 짓고 꾸미게 했지만 당시 대군주들이 했던 것 이상으로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황제의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던 뛰어난(사실상 초인간적인) 재능을 제외하면, 우스꽝스러운 계략들을 즐긴다는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필립스부르크 포위에서 라인 강의 흐름을 바꾸어서 프랑스 진영으로 통하게 하려는 생각을 하고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베오그라드에서 외젠은 도시 위쪽에 닻을 내렸던 오스트리아의 소함대를 여러 운하를 통해 이동시켜 갑자기 도시 아래쪽에 출현시켰다. 그는 또한 사병들의 유치한 장난에도 열중했는데 적들을 희생물로 만들어버리는 결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정치만큼이나 관심을 쏟았던 대상은 재정으로, 공공재산뿐 아니라(그는 제국의 재무대신이었음) 자신의 재정에도 관심이 많아 25길더를 가지고 오스트리아에 와서 약 2,500만 길더의 재산을 남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