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엇

와이엇

다른 표기 언어 Sir Thomas Wyat, the Younger
요약 테이블
출생 1521경
사망 1554. 4. 11,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잉글랜드의 군인·음모가.
Wyat은 Wyatt이라고도 씀.

그가 주도한 메리 1세에 대한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튜더 왕가가 겪은 최대의 봉기였다.

그의 아버지 토머스 와이엇 경은 유명한 시인이며 외교관이었다. 청년시절에 그는 저돌적인 품성으로 이름이 나 있었고 1543년에 런던의 시가 봉기에 참가했다가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1543~49(또는 1550)년 프랑스 등 해외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노련하고 용감한 장교로 인정을 받았다. 그뒤 잉글랜드로 돌아와 1551년에 켄트 주장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초보적인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1553년 7월에 에드워드 6세가 죽자 그는 가톨릭교도인 메리의 왕위계승을 지지했지만 그해 말에 여왕에게 등을 돌렸다. 메리가 나중에 스페인 왕이 된 펠리페와 결혼하는 것은 잉글랜드의 국위를 손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 서퍽 공작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을 음모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1554년 1월말 음모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데번 백작에 의해 메리의 총리 스티븐 가드너에게 정보가 누설되는 바람에 와이엇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군대를 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처음에 정부는 그에게 협상을 제의했으나 곧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반란진압을 위해 파견한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가 이끄는 군대는 대부분 와이엇 편으로 돌아섰다.

1554년 2월 3일 와이엇은 약 3,0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런던 교외로 진입했다. 그는 재빨리 시(市) 중앙으로 진격했지만 그의 군대는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사기가 꺾였다. 국왕군과 맞붙은 군대는 짤막한 접전 끝에 항복했으며, 와이엇은 3월 15일 재판을 받고 그로부터 1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처형되었다.

그에 앞서 메리의 지지자들이 와이엇을 설득해서 음모에 엘리자베스 공주(나중에 여왕이 됨)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와이엇이 죽은 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리가 프로테스탄트들을 박해함에 따라 점점 그녀를 혐오하게 된 대중들에 의해 애국자이자 순교자로 간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