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란도

오를란도

다른 표기 언어 Vittorio Emanuele Orl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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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0. 5. 19, 이탈리아 팔레르모
사망 1952. 12. 1,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 총리가 되었으며,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이탈리아 수석 대표로 참석했다. 팔레르모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선거 개혁과 정부 행정에 관한 저술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후 1897년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1903~05년 교육장관을 지냈으며, 1907~09년 법무장관으로 재직했고, 1914년에도 다시 법무장관으로 일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참전(1915. 5)을 주장했으며, 1917년 10월 이탈리아군이 카포레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함으로써 야기된 위기상황 속에서 총리가 되어 국가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을 승리로 마친 후, 파리에서 열린 베르사유 회담에서 오를란도는 이전의 오스트리아 영토에 대한 이탈리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전쟁 후 유고슬라비아가 점령한 피우메 항구 문제로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윌슨은 오를란도를 무시하고 이탈리아 국민에게 직접 호소했는데, 이러한 윌슨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오를란도가 연합국들로부터 아무런 양보도 받아내지 못하자 국내에서의 지위는 흔들렸으며, 1919년 6월 19일 마침내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2일 그는 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노동자 조직과 새로 생긴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대립하게 되자 그는 처음에는 무솔리니를 지지했다. 그러나 사회당의 지도자 자코모 마테오티가 파시스트에게 암살당하자 지지를 철회했다(이 살해사건은 무솔리니가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서 벌인 파시스트 활동의 서막이었음).

시칠리아 지방 선거에서 그는 파시스트당을 반대했으며, 파시스트들의 선거 부정(1925)에 항의하여 국회를 떠났다. 그후 정치에서 물러나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해방된 로마에서 국회자문위원직을 맡게 되었으며, 1946년 6월 제헌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 평화 협정에 반대하면서 다시 정계에서 물러났다. 1948년 새로이 발족된 이탈리아 상원의 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루이지 에이나우디에게 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