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연산군

다른 표기 언어 燕山君 동의어 이융, 李㦕,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요약 테이블
출생 1476(성종 7)
사망 1506(중종 1)
국적 조선, 한국
종교 유교(성리학)
재위 1494년~1506년
융(漋)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

요약 조선시대 대표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조선 제10대 왕이자 성종의 맏아들로 이름은 융. 재위 중 신진 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하려는 훈구파의 모의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상처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관련된 많은 인물을 처형해 조선시대 대표 폭군으로 일컫는다. 즉위 초 빈민구제정책, 서적 간행, 국방 강화책 등을 시행했으나, 또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왕권을 견제하는 기관들을 폐지하고, 인수대비 상례를 대충 치르는 등 유교사상에 반하는 행위가 잇따르자 성희안 등이 왕을 몰아내고 성종의 차남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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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즉위와 무오·갑자 사화
  3. 중종반정과 폐위
연산군일기
연산군일기

개요

재위중 무오·갑자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관(言官) 제도를 크게 축소했으며, 당시 사대부들의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손꼽힌다. 이름은 융(이미지).

즉위와 무오·갑자 사화

성종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지평(持平) 윤기묘(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이다.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된 뒤인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徐居正)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또한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는 등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으며, 〈경상우도지도 慶尙右道地圖〉·〈국조보감 國朝寶鑑〉·〈동국명가집 東國名歌集〉 등을 간행하고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 歷代帝王詩文雜著〉·〈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완성했다. 그러나 사림파 제거를 노린 훈구파의 정치적인 공작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되면서 형성된 성격상의 문제가 겹쳐 1498, 1504년 2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사화를 일으켰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실은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한 것이라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을 처형했으며, 정여창(鄭汝昌)·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강혼(姜渾) 등을 귀양보냈다(무오사화). 1504년에는 어머니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했던 후궁들과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김굉필 등을 처형하고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정여창·남효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했다(갑자사화). 이 옥사에서는 무오사화 때와는 달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와 함께 훈구파의 거목들도 대거 참화를 당했는데, 이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등을 위해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훈구파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중종반정과 폐위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연산군에 대한 반감은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들간에도 커지게 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킨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3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의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채청사(採靑使)·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징발하고, 장악원(掌樂院)을 두어 기녀(妓女)를 양성한데다가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사대부의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등 음행을 일삼았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세움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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