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

다른 표기 언어 Epicouros
요약 테이블
출생 BC 341, 그리스 사모스
사망 BC 270, 아테네
국적 그리스

요약 소박한 즐거움, 우정, 은둔 등에 관한 윤리철학의 창시자로서, 에피쿠로스 학파를 낳았다. 그는 철학의 목적을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데 두고 평정과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고통 없는 삶을 역설했다. 아울러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원자론에 기댄 듯 보이는 이러한 이론은 그가 자연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나우시파네스 밑에서 공부했다는 데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는 이 이론을 자연학의 연구수단이 아니라 윤리적 목적을 추구하는 철학체계의 기초로 사용했다.
BC 306년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에 집을 사 호케포스('정원'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학원을 세우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이 학원은 곧 다른 두 학원,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과 경쟁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에피쿠로스 학파는 당시 여성을 정식으로 받아들인 첫 학파였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교육
  3. 아테네와 그밖의 지역의 학원
  4. 저술
에피쿠로스(Epicouros)
에피쿠로스(Epicouros)

개요

소박한 즐거움, 우정, 은둔 등에 관한 윤리철학의 창시자로서, BC 4세기~AD 4세기에 있었던 철학 학원들을 창설했다.

초기생애와 교육

군인으로서 사모스 섬에 정착한 아테네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학원 교사인 아버지는 네오클레스, 어머니는 카이레스트라테였다. 두 사람은 같은 가르게토스 시 출신이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14세 때 철학공부를 시작했으며, 학원의 스승이 그리스 초기의 철학시인인 헤시오도스의 '혼돈' 개념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의 첫 스승은 플라톤주의자인 사모스의 팜필로스였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에피쿠로스가 3년 동안(BC 327~324) 테오스라는 이오니아의 도시에서 학생생활을 했는데, 자연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나우시파네스가 당시 그의 스승이었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이론이 나온 듯하다. 그는 이 이론을 자연학의 연구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윤리적 목적을 추구하는 철학체계의 기초로 사용했다.

18세 때 그는 아테네로 가 아테네 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2년간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곳에 있는 동안 플라톤에 이어 아카데메이아의 원장이 된 크세노크라테스와 당시 아테네에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1년 뒤 콜로폰에서 부모와 합류했다.

라미아 전쟁 끝에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에게 사모스를 잃자 그의 부모는 콜로폰으로 망명해 있었다. 그후 10년 동안의 행적에 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 시기 동안에 에피쿠로스는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한 듯하다. 바로 이 시기에 그가 자기나름의 철학 견해를 개발하고 플라톤주의자·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의견을 교환하면서 그 견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이노안다의 디오게네스는 에피쿠로스가 테오스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통을 보관해두었다.

에피쿠로스는 32세 때 처음에는 미틸레네에서, BC 311(또는 310)~307(또는 306)년에는 람프사코스에서 가르쳤다.

여러 곳에서 에피쿠로스는 장차 그를 따라 아테네로 가 에피쿠로스 학파를 한층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중간역할을 하게 될 제자들을 만났다. 미틸레네에서 만난 첫번째 제자 헤르마르코스는 결국 그의 뒤를 이어 아테네 학원의 원장이 되었다.

람프사코스에서는 메트로도로스와 폴리아이노스를 만났다. 그들이 스승인 자기보다 먼저 죽자 에피쿠로스는 그 아들들을 돌봐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밖에도 그가 유언에서 부양하라고 한 사람으로는 메트로도로스의 형제인 티모크라테스, 레온테오스와 그의 아내이자 고급 창녀였던 테미스타, 에피쿠로스가 콜로타리온이라는 애칭으로 치켜세운 콜로테스, 이도메네오스와 그의 아내이자 메트로도로스의 여동생인 바티스 등이 있다.

결국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에서 보낸 2년을 빼고는 35세까지 아시아에서 살았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그가 아테네의 문필계에 대해 반감을 키웠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가 평생 동안(소아시아를 여행한 2~3년을 포함) 집중적으로 맺어온 아시아와의 끈은 주로 그의 단어와 문체 선택에, 더 중요하게는 그의 철학의 범세계적 영역에 반영되어 나타난 듯하다.

아테네와 그밖의 지역의 학원

BC 306년 에피쿠로스는 동료들과 함께 아테네로 돌아와 집 1채를 사 그 정원에 학원을 세웠다.

이 학원은 호케포스('정원'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때 아테네에서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이 문화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두 학원은 모두 후계자가 맡아 이론적으로 우수한 학생과, 철학을 정치와 공공생활에 적용하는 데 관심이 있는 학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스토아 학파가 몇 년 뒤에 그랬듯이 이 시기에 아테네에 학원을 세워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곧 아카데메이아·리케이온과 경쟁관계에 들어선다는 뜻이었다.

에피쿠로스가 아테네로 가져온 것은 학원이나 공동체라기보다 생활양식이었다. 유명한 두 학원과는 달리 에피쿠로스의 학원에서는 이 생활양식이 여성과 '무세'라 불린 에피쿠로스의 노예에게도 허용되었다. 이 생활양식은 정치활동과 공공생활을 피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학원은 아테네 외부 학원 출신인 한 추종자가 정치권력을 얻었다가 잃었을 때 그를 도와주기도 했다.

오늘날 '에피쿠로스적'이라는 용어가 연상시키는 보통의 의미와는 달리 그 집과 정원에서의 생활은 단순했다. 하루에 1/2파인트 분량의 포도주가 허용되었지만 평소 마시는 것은 물이었고 보리빵이 주식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와 달리 공유재산도 없었다. 기근이 일어났을 때 에피쿠로스는 매일 콩을 여러 알씩 나누어주면서 학생들을 구했다. 반면에 학생들 사이의 관계는 당대의 의미에서든 후대의 의미에서든 플라토닉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성적 부정행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반대파인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 공격한 것이 남아 있다. 에피쿠로스가 쓴 글은 명쾌하지만 그다지 체계적이지 않다. 아테네에 있는 학생들 및 다른 학파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중 몇몇은 학설과 관련된 것이지만 대부분은 사교와 친분을 위한 것인 듯하다.

72세 때 전립선염으로 고통스럽게 죽던 날 에피쿠로스는 이도메네우스에게 보내는(사실은 람프사코스에 있는 모든 친구에게 보내려 한 듯함) 감동적이고 애정어린 편지를 받아적게 했다.

이 행동은 그가 심한 고통 속에서도 안식과 평온에 관한 자신의 철학에 끝까지 충실했음을 잘 보여주었다. 에피쿠로스는 유언으로 집과 정원과 약간의 돈을 학원관리자에게 남겼다. 나머지 돈은 에피쿠로스의 죽은 가족을 제사지내고 매년 그의 생일과 매달 그에 대한 추억을 기리는 데 쓰였다. 그의 노예들은 해방되었고, 메트로도로스의 딸이 헤르마르코스의 승락을 얻어 아테네 학원의 누군가와 결혼할 비용도 남아 있었다.

저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에피쿠로스를 최대의 다작가로 묘사했고 그의 3통의 편지와 〈주요학설 Kyriai doxiai〉을 보존했다.

3통의 편지는 자연학을 다룬 〈헤로도토스에게〉, 기상학에 관한 〈피토클레스에게〉(한 제자가 요약한 글인 듯함), 윤리학과 신학에 관한 〈메노이케우스에게〉이다.

〈주요학설〉은 40개의 짧은 경구로 되어 있다. 또다른 주요전거는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카사 데이 파피리의 파피루스이다. 이 파피루스는 원래 37권으로 된 그의 대작 〈자연에 관하여 Peri physeōs〉의 일부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중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많은 방법 덕분에 종교적 인물에 견줄만했다.

BC 1세기 동안 로마에서 그의 주장이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시인·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가 에피쿠로스를 자기 연구의 기초로 삼은 점(루크레티우스는 실제로 외경심을 가지고 에피쿠로스를 존경했음), 정치가·도덕가인 키케로가 그의 사상을 언급한 점, 전기작가인 플루타르코스가 어떻게 카시우스가 에피쿠로스적 관념으로 브루투스의 마음을 달랬는지를 자세히 기술한 점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이론은 17세기에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피에르 가상디가 되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