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테드보드

에이스테드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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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세의 궁정 음유시인이라는 전통에서 비롯된 웨일스 음유시인들의 공식회합.

19세기에 부활되어 해마다 여름이면 웨일스 지방의 북부와 남부를 번갈아가며 열린다. 현대의 '전국 음유시인 경연대회'는 그 범위가 넓어져 음악·산문·극·미술까지도 포함하게 되었으나 대회의 절정은 여전히 우승한 시인을 어깨에 태우고 돌아다니는 임관의식이다.

초기의 회합은 음악가들(특히 하프 연주자)과 시인들의 경연대회였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음악·문학·웅변 형식이 생겨났다. 카마던 회합(1451)은 웨일스 시의 엄격한 운율을 오늘날까지 독자적인 형태로 유지하는 법을 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7세기 들어 이러한 관행은 없어졌지만 시는 여전히 대중적인 예술이었으며, 아마추어 시인들이 모여 즉흥 주제로 시를 짓는 비공식 모임을 통해 에이스테드보드의 명맥이 이어졌다. 18세기에 각 지방에서 에이스테드보드가 부활되었을 때, 평범한 농부와 노동자들이 상을 많이 탄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사람들이 음유시 작시법의 복잡한 기교를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는 해마다 열리는 전국 회합과 수많은 지방 경연대회를 통해 에이스테드보드가 웨일스 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음유시의 형식을 보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에이스테드보드를 통해 창작된 시의 수준은 대개 조야(粗野)했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형편없는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경연대회에서 주어진 주제는 웨일스의 역사나 전원풍경에 대한 예찬, 천지창조나 부활 같은 성서적 주제, 자선 같은 추상적 주제 등이었다. 그러한 시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정서를 담아내지 못했으며, 형식을 중히 여기고 내용이나 감정의 깊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는 장황한 묘사체 작품이 되기 마련이었다. 웨일스가 특히 큰 타격을 입은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계기로 많은 웨일스 시인들은 좀더 개인적이거나 현실과 연관된 시 쪽으로 돌아서게 되어, 에이스테드보드는 주로 젊은 시인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장(場)으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