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테르하지가

에스테르하지가

다른 표기 언어 Esterhazy family

요약 헝가리 마자르족의 귀족 가문.
Eszterh대체이미지zy라고도 씀.

외교관, 군 장교, 예술 후원자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포조니(지금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주의 부지사 페렌츠 제르하지(1563~94)는 이 가문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첫번째 인물이다. 그는 골란토 남작이 되자마자 에스테르하지라는 이름을 썼다. 골란토는 이 가문이 1421년에 획득한 영지였다. 이 가문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프로크노·체스네크·졸리옴 가계로 나누어졌다.

미클로슈(1582~1645)는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프로크노 가계를 세웠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옹호자인 가보르 베틀렌과 디외르디 라코치 1세에 반대했으며,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헝가리를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유대 강화를 통해 해방시키려는 생각을 견지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티아스와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예우를 받았으며 소프론에서 열린 제국의회(1625)에서는 헝가리의 팔라틴 백작(황제를 대신해서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미클로슈의 셋째 아들인 팔(1635~1713)은 프로크노 계열의 분가를 세웠다.

그는 투르크와의 전쟁 때 두각을 나타내 1667년 남부 헝가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팔라틴 백작으로 선출된 지 2년 뒤인 1683년 빈 구출작전에 참여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헌신한 대가로 1687년 제국의 제후로 봉해졌고 예술과 학문을 애호한 그는 종교 저술도 몇 편 남겼다. 팔 온톨 공(1711~62)은 팔의 손자로 육군 원수가 되었고 동생 미클로슈 요제프 공(1790 죽음)도 뛰어난 군인이며 예술 후원자로 가문의 성(城)인 에스테르하조를 헝가리의 베르사유라고 할 만큼 웅대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지었으며 요제프 하이든을 30년 동안 자신의 악단 지휘자로 고용했다.

미클로슈 공(1765~1833)은 미클로슈 요제프의 손자로, 빈의 회화·조각 수집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에 대항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자비로 연대 규모의 군대를 일으켰으며 1809년 나폴레옹에게서 마자르족의 왕으로 선출되도록 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계속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지했다. 아들인 팔 온톨 공(1786~1866)은 런던과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일했는데 나폴레옹 전쟁 동안은 런던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서기관이었으며 그뒤(1807) 파리에서는 메테르니히 아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1815) 영국 주재 대사가 되어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의 대관식과 런던 회담(1830~38)에 오스트리아 대표로 참여했다. 1848년 제1차 책임내각에서 헝가리의 외무장관이었던 그는 왕실과 국민을 화해시킬 만족스런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직해 말년에는 은둔생활을 했다.

프로크노 백작 계열은 프로크노 에스테르하지의 2번째 분파인데, 팔 공의 동생인 페렌츠 에스테르하지(1641~83)의 아들들에 의해 셋으로 갈라졌다.

큰아들 온톨 백작(1676~1722)은 합스부르크가에 반대한 마자르 귀족이며 국민 영웅인 페렌츠 라코치 2세에 대항한 전쟁뿐만 아니라 그와 동맹한 전쟁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고 1710년 폴란드, 뒤에는 프랑스와 투르크로 라코치를 수행했으며 투르크 망명중 죽었다. 미클로슈 발린트(1740~1806) 백작은 온톨 백작의 아들인 요제프 발린트의 아들로 프랑스군에 입대해 마리 앙투아네트와 앙주 백작(나중에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의 총애를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 왕당파의 다수가 국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