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

어윤중

다른 표기 언어 魚允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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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8(헌종 14)
사망 1896(건양 1)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온건개화파로서 1894년 갑오개혁 내각에서 탁지부대신이 되어 재정·경제 부분의 개혁을 단행했다.
1881년 조정에서 신사유람단 60명을 일본으로 파견할 때 박정양·홍영식 등과 함께 반장인 조사로 선발되었는데, 그가 맡은 부문은 재정·경제 부문이었다. 1882년 문의관의 직책으로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었는데, 이는 조미수호조규에 대하여 청나라에 문의하고 당시 톈진에 파견되어 있던 공학도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내각과 박정양내각에서 탁지부대신이 되어 재정·경제 부분의 대개혁을 단행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이 붕괴되자, 낙향하는 길에 피살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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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개요

어윤중
어윤중

온건개화파로서 1894년 갑오개혁 내각에서 탁지부대신이 되어 재정·경제 부분의 개혁을 단행했다.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

생애

아버지는 약우(若愚)이다.

9세 때 어머니가, 16세 때 아버지가 죽었다. 1869년(고종 6)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주서·헌납·교리·지평·필선을 거쳐 양산군수를 지냈다. 1872년 당시 20세의 김옥균(金玉均)이 장원급제한 과시에 시험관을 지냈다. 1877년 홍문관교리를 거쳐 전라우도암행어사에 임명된 뒤, 만 9개월 동안 전라도 일대를 돌아보고 12개조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전라도 지방의 문제가 주로 수취제도의 문란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잡세의 혁파, 지세제도의 개혁, 환곡제도의 폐지, 삼수포세의 폐지, 재결감세(災結減稅) 등 제반 수취제도의 개혁을 주장했고, 이와 아울러 궁방전과 아문둔전의 개혁, 지방수령의 5년임기 보장, 도량형의 통일, 조운선(漕運船) 제조, 역로제도(驛路制度) 개혁 등을 주장했다.

그의 개혁안은 당시에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갑오개혁기에 여러 개혁으로 구체화되었다(개화사상).

1881년 조정에서 신사유람단 60명을 일본으로 파견할 때 박정양(朴定陽)·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반장인 조사(朝士)로 선발되었는데, 그가 맡은 부문은 재정·경제 부문이었다. 유길준(兪吉濬)·유정수(兪定秀)·윤치호(尹致昊)·김양한(金亮漢) 등의 수행원과 통역관·하인을 거느리고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오사카[大阪]·교토[京都]·고베[神戶]·요코하마[橫浜]를 거쳐 도쿄[東京]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그는 약 3개월에 걸쳐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시설·문물·제도 등을 상세히 시찰하고 많은 참고자료를 수집했다. 다른 조사들은 같은 해 7월에 귀국했지만, 그는 수행원인 유길준과 윤치호를 일본에서 더 공부하도록 남겨놓고 당시 중국에 가 있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기 위하여 일본을 떠나 9월 상하이[上海]를 거쳐 톈진[天津]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어윤중은 김윤식과 청에 유학온 우리나라 공학도(工學徒)를 만나고 당시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해관총독(海關總督) 주복(周馥) 등과 회담한 뒤 이해 12월에 귀국했다. 그는 1년간에 걸친 일본·중국 시찰의 복명서(復命書)를 제출하고 국왕에게 그가 견문한 사실과 우리나라의 개화를 위한 정책을 개진하여, 초기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작용을 했다.

1882년 문의관(問議官)의 직책으로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었는데, 이는 조미수호조규에 대하여 청나라에 문의하고 당시 톈진에 파견되어 있던 공학도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4월 그는 조미통상조약 문제를 심의하고 조미수호조규에 합의했으며, 영국대표와 만나 조영수호조규를, 독일대표와 조독수호조규를 협의했다. 그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했다가 군란이 평정된 뒤에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어 불평등조약인 조중수륙무역장정(朝中水陸貿易章程)에 조인했다.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와 중강무역장정(中江貿易章程)·회령통상장정(會寧通商章程)을 협정했으며, 또한 도문강(圖門江)과 두만강의 국경지대를 조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884년에 서북경략사와 병조참판을 겸임했으며, 뒤에는 호조참판을 겸임했다.

1884년 어윤중은 잠시 보은으로 가 있는 동안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나 정변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뒤 중용되지 못하다가 1893년 동학교도들이 보은집회를 열자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로 임명되어, 당시 관료들이 동학도를 비도(匪徒)라 칭하면서 탄압하는 분위기에서 처음으로 동학도를 민당(民黨)이라 칭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주장의 당위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내각과 박정양내각에서 탁지부대신이 되어 재정·경제 부분의 대개혁을 단행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이 붕괴되자 그는 고향인 보은으로 피하고자 했는데, 용인군 장서리(長西里)를 지나던 중 산송문제(山訟問題)로 원한을 품고 있었던 정원로(鄭元老) 등의 향반배(鄕班輩)가 머슴을 동원, 기습하여 1896년 2월 17일 피살되었다. 저서로는 〈동래어사서계 東萊御史書啓〉·〈수문록 隨聞錄〉·〈서정기 西征記〉·〈간독요초 簡牘要抄〉·〈종정연표 從政年表〉 등이 있다.

1910년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