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앨버트

다른 표기 언어 Albert, prince consort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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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9. 8. 26, 작센-코부르크-고타 코부르크 근처 로제나우 성
사망 1861. 12. 14,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여왕 빅토리아의 남편이자 에드워드 7세의 아버지.
(독). Franz Albrecht August Karl Emanuel, Prinz von Sachsen-Coburg-Gotha. 본명은 Francis Albert Augustus Charles Emmanuel, prince of Saxe-Coburg-Gotha.

그 자신은 인기가 없었지만 빅토리아 여왕과는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고 이는 여왕의 즉위 당시 불안정했던 군주제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장티푸스로 죽을 때에야 절대적인 외국인으로 생각했던 영국 국민의 오해가 풀려 마침내 그의 탁월한 자질을 인정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거의 40년을 홀로 살면서 중요한 시기마다 앨버트가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생각하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베틴 왕가의 에른스트파 가계에 속하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에른스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브뤼셀과 본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사촌간인 빅토리아와 그의 결혼을 추진한 사람은 숙부인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였다. 1839년 10월 15일 젊은 여왕은 그에게 청혼했고 1840년 2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곧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비서이자 가장 믿을 만한 조언자 역할을 했다. 원래 게으른 성격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부지런함을 본받아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여왕은 그의 권고에 따라 좀더 적절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휘그당과 협력관계를 끊었다. 1856년 프로이센, 1861년 미국과의 분쟁이 평화롭게 끝난 것도 부분적으로는 외무부 문서가 최후통첩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말을 바꾸라고 제안한 앨버트의 공이었다.

파머스턴 경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은 앨버트의 경계심 많은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영국의 귀족들은 왕실의 엄격한 도덕적 분위기를 싫어했을 뿐 아니라 앨버트가 그들만큼이나 승마와 사격을 잘했음에도 그의 교수 같은 몸가짐이나 다채로운 예술적 취미를 좋아하지 않았다. 앨버트는 런던의 건축업자인 토머스 큐빗과 함께 1845~51년에 아일오브와이트에 왕실 별장으로 오스본 하우스를 설계했다.

그는 훌륭한 음악가였으며 1851년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 국제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건강이 매우 악화된 뒤에도 1862년에 열릴 사우스켄징턴 박람회를 계획했다.

그의 전기인 찰스 그레이 중장의 〈여왕 부군의 초기생활 Early Years of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Consort〉(1867)과, 시어도어 마틴 경의 〈여왕 부군의 생애 Life of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Consort〉(5권, 1875~80)는 빅토리아 여왕의 요청으로 씌어졌다. 최근 전기로는 대프니 베넷의 〈왕관 없는 왕 King Without a Crown〉(1978)과 로버트 로즈 제임스의 〈앨버트 부군 Albert Prince Consort〉(198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