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

안평대군

다른 표기 언어 安平大君 동의어 이용, 李瑢, 청지, 淸之, 비해당, 匪懈堂, 낭간거사, 琅玕居士, 매죽헌, 梅竹軒, 장소, 章昭
요약 테이블
출생 1418(태종 18)
사망 1453(단종 1)
국적 조선, 한국

요약 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큰형은 문종이고 둘째 형이 세조이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1452년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안평대군도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귀양지에서 죽었다.

안평대군 필적
안평대군 필적

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했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

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큰형은 문종이고 둘째 형이 세조이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했다.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1438년 왕자들과 함께 함경도에 설치된 육진(六鎭)으로 가서 변방의 경계 임무를 맡으면서 야인(野人)들을 토벌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황표정사(왕자들이 추천한 사람 가운데 왕이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의 배후실력자로 등장했다. 특히 1452년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다.

1452년 7월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 돌아온 뒤에는 황표정사를 폐지했다. 이에 안평대군은 잃어버린 권력의 회복에 힘써,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함경도 경성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게 하여 무력을 기르는 한편 1453년(단종 1) 9월 황표정사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달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했으며 안평대군 자신도 더불어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귀양지가 교동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예술활동과 작품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 불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

무이정사와 담담정을 짓고 문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고, 궁중에 소장된 서화와 자신이 모은 중국 서화가들의 작품을 연구·수련하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이를 소개하는 등 당시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의 글씨는 고려말부터 유행한 조맹부의 필체를 따랐으나 이를 한국적인 필법으로 발전시켜 조선 중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의 사신들로부터 "조맹부에게 배웠으나 조맹부보다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꿈에 본 광경을 당대 제일의 화가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에 발문을 쓰고, 여러 학자 문사들에게 글을 짓게 하여 큰 시화첩을 만들기도 했다.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

1452년 경자자를 개주해 만든 임신자의 자모를 썼다. 1747년(영조 23)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그의 글씨로는 경기도 영릉에 있다가 현재 서울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진 〈세종대왕영릉신도비 世宗大王英陵神道碑〉, 용인 〈청천부원군심온묘표 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 〈임영대군묘표 臨瀛大君墓表〉 등 금석문이 남아 있다. 시호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