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안재홍

다른 표기 언어 安在鴻 동의어 민세, 民世, 우헌, 又軒, 경륙, 景陸
요약 테이블
출생 1891. 12. 30, 경기 평택
사망 1965. 3. 1, 평남 평양
국적 한국

요약 〈시대일보〉를 시작으로 언론에 몸담은 그는 해박한 지식과 사려 깊은 안목, 날카로운 필치로 1920~30년대에 대중을 깨우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8·15해방 후에는 민주독립국가를 구현하고자 언론과 정계를 뛰어다닌 대표적인 대논객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9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쳐 1931년 사장이 되었으며, 1919년 이후 20여년 동안 9번에 걸친 투옥으로 7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뤄야 했고,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되기도 했다. 1946년 2월 26일에는 〈한성일보〉를 창간하여 발행인 겸 사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안재홍

아버지 윤섭(允燮)과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에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에서 한학을 익히다가 1907년 서울에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 이상재·남궁억·윤치호 등의 지도 아래 감화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에 있는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191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 졸업했다.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학감으로 있었고, 1917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5월 비밀조직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총무로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4년 3월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에 첫발을 디딘 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 겸 이사가 되었고, 1926년 9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이 되었다.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를 맡아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벌여 2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른 뒤 1929년 1월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쳐 1931년 5월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이른바 재만(在滿)동포구호의연금 유용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35년 5월부터 〈조선일보〉의 객원으로 〈민세필담 民世筆談〉을 집필했다. 그러던 중 1936년 6월 난징[南京]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사건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38년 5월 흥업(興業) 클럽 사건으로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1919년 이후 20여년 동안 9번에 걸친 투옥으로 7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뤄야 했고,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8·15해방 후 건국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지만 곧 사퇴했고, 그해 9월 24일 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1946년 2월 26일에는 〈한성일보〉를 창간하여 발행인 겸 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미군정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거쳐 1947년 민정장관을 맡으면서 잠시 신문사를 떠났다가 1950년 5월 다시 사장으로 복귀했으며, 곧바로 제2대 총선에 출마하여 고향인 평택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 납북되었다.

〈시대일보〉를 시작으로 언론에 몸담은 그는 해박한 지식과 사려 깊은 안목, 날카로운 필치로 1920~30년대에 대중을 깨우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8·15해방 후에는 민주독립국가를 구현하고자 언론과 정계를 뛰어다닌 대표적인 대논객(大論客)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신민족주의 이론을 전개하여 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민족사관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