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날도

아르날도

다른 표기 언어 Arnaldo da Brescia
요약 테이블
출생 1100경, 베네치아 공국 브레시아
사망 1155. 6경, 교황령 시비타 카스텔라나(또는 몬테로톤도)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
(영). Arnold of Brescia.

성직자들의 부와 타락을 솔직하게 비판하고, 교황들이 세속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열렬히 반대했다. 1137년 주교 만프레드의 지배에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거기에 가담했고, 성직자들을 개혁하고 교회의 세속 통치를 중단하라고 외침으로써 1139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분열주의자라는 죄목으로 파문당했다.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한 아르날도는 프랑스로 가서 유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피에르 아벨라르의 후원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1141년 프랑스 상스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의 완강한 요구에 따라 이단자로 정죄받았다. 아벨라르는 굴복했지만, 아르날도는 과감하게 파리에서 계속 가르치다가 베르나르도의 집요한 간섭으로 1141년 프랑스 왕 루이 7세에게 유배당했다. 아르날도는 처음에는 취리히로 도망갔으나 다시 독일 파사우로 가서 추기경 기도의 보호를 받았고, 그의 중재로 1145년 9월 교황령 비테르보에서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화해했다. 그 일이 있기 2년 전 로마에서는 교회의 통제에서 독립하려는 '레노바티오 세나투스'(원로원 부활) 운동이 일어나 교황 인노첸시오와 추기경들을 쫓아내고 고대 원로원을 회복했으며 로마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에우제니오는 아르날도를 로마로 참회순례를 보냈으나 그는 로마에서 반란자들에 가담하여 교황과 추기경들을 공격하는 설교를 다시 시작했고 1148년 7월에 파문당했다. 교회개혁을 위한 그의 운동은 세속 군주와 다름없는 권력을 누리던 교황에 대한 반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결과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시민들이 새로이 쟁취한 독립을 굳건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1155년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로마에 성무금지령을 내리고 시민들에게 아르날도를 내줄 것을 요구했다. 원로원이 그 요구에 굴복하자 공화국은 무너졌고, 교황 정부가 복원되었다. 아르날도는 도망했다가 당시 대관식 때문에 로마를 방문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군대에 붙잡혔으며, 교회 재판소에서 이단 판결을 받고 황제에게 넘겨져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시체는 다시 불태워졌으며, 그 재는 티베르 강물에 뿌려졌다.

아르날도는 성격이 엄격했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아놀드주의자로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은 영적 권력과 물질적인 소유는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교회가 세속 권력을 갖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1184년 베네치아 공국 베로나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정죄받았다. 아르날도의 인격은 근대의 여러 시인과 극작가, 그리고 이탈리아의 정치가들을 통해 왜곡되어왔다. 그는 무엇보다도 상황 때문에 정치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종교 개혁가였다.

1931년 G. W. 그리너웨이가 쓴 〈브레시아의 아르날도 Arnold of Brescia〉가 간행되었으며, 여기에는 충분한 참고도서 목록이 곁들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