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경

심유경

다른 표기 언어 沈惟敬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중국, 명(明)

요약 중국 명나라의 신하.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 출신.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조선·일본·명 3국 사이에 강화회담을 맡아 진행하면서 농간을 부림으로써 결국 정유재란을 초래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에 의해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발탁되어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원군(援軍) 부대와 함께 조선에 왔다.

1592년 8월 명나라군이 평양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자, 일본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강화회담을 교섭한 뒤 쌍방이 논의한 강화조항을 가지고 명나라로 갔다가 돌아오기로 약속했다. 그러던 중 1593년 1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에서 일본군을 물리치자 화약은 파기되었다. 하지만 곧 이어 명군이 벽제관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게 되면서 명나라가 다시 강화회담을 시도함에 따라 심유경은 일본진영에 파견되었다. 이후 그는 명과 일본간의 강화회담을 5년간이나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고니시와 의견 절충 끝에 나고야[名護屋]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났는데,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해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명이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게 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에 심유경은 이러한 요구가 명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일본의 요구조건을 거짓으로 보고했다. 즉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책봉해 줄 것과, 명에 대한 조공(朝貢)을 허락해 줄 것을 일본이 요구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명나라는 이를 허락한다는 칙서를 보냈으나 두나라의 요구조건이 상반되자 강화회담은 결렬되었고, 결국 일본의 재침입으로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했다. 후에 그의 비리가 폭로되어 엄형에 처형될 뻔 했으나, 석성에 의해 겨우 구제되었다. 그러나 그뒤 조선에 다시 들어와 화의를 시도하다가 실패했고, 경상남도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 잡혀서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