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신민회

다른 표기 언어 新民會

요약 한말 애국계몽운동기 개화자강파들이 일제에 반대하여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창건한 전국적 규모의 비밀결사 조직.

목차

접기
  1. 창립과정
  2. 조직과 이념
    1. 조직
    2. 이념
  3. 활동
  4. 해체와 의의

1907년 4월에 안창호의 발기에 의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과 서울 지역의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안창호
안창호

창립과정

1906년말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남쪽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의 발의에 의하여 이강·임준기 등이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1907년 2월 안창호는 귀국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역설하면서 각지에 강연회를 열고 동지를 모았다. 그는 즉시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급진론에 반대했으며, 동지들의 단결로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도모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편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인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의 창립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렬·안창호 등 7명이 창건위원이 되어 신민회를 창립했다.

조직과 이념

조직

신민회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그 조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대체로 중앙에 회장·부회장·총감독·의사원·재무원·집행원·감찰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최고지도부를 이루었으며, 각 도에서 선정된 의사원이 모여 본회의 의결기관을 이루었다.

지방조직으로는 각 도에 총책임자로서 도총감 아래 군감·반(班)을 편성했다. 마치 대의국가의 조직과 비슷한 형태로 조직되었으며, 당시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하는 언론활동세력, 신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세력, 평안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던 상인과 실업가 등 민족 자본가 세력 및 해외 국권회복운동 단체들이 참여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였던 관계로 조직을 철저히 관리하여, 일반회원들은 종적으로만 연결시켜 횡적으로는 동지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또한 회원의 입회를 엄중히 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입회시켰다.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조직한 이유는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신민회의 회원수도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대체로 800여 명으로 보고 있다.

이념

신민회는 일제의 보호국 체제하에서 조국의 국권회복, 즉 독립자주국가의 건설을 목적으로 했으며 그 정체는 궁극적으로 입헌공화국이 아니라 공화정체를 구상했다. 이러한 신민회의 국권회복론은 먼저 실력을 양성하여 장차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선실력 후기회론'이었다.

한편 신민회는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군사기지건설에 의한 실력양성론도 구상했다.

활동

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

신민회는 국권회복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초기에는 국민계몽운동과 민족교육에 활동의 중심을 두었다.

국민계몽을 위하여 기관지로서 신문을 새로 창간하지는 않았지만 양기탁 등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활용했고, 1908년 11월에 최남선의 주도하에 〈소년〉지를 기관잡지로 창간했다. 평양·서울·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운영했고,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은 각종 강연회에서 계몽강연활동을 했다. 이러한 신문·잡지·강연 등을 통하여 사회일반에 애국주의·국권회복·민권사상을 고취하고, 신사상·신지식·신산업의 필요성을 계몽했으며, 교육구국·학교설립·학회활동을 고무시켰다.

따라서 신민회의 회원들은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강화의 보창학교(普昌學校),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 등 많은 학교를 설립했다. 대체로 신민회계통의 학교는 신민회세력이 강했던 경기도 이북지방에 많이 세워졌고, 신민회 회원과 지방유지들의 협력으로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민회는 학교교육을 통하여 근대적 문명지식과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민족운동가를 양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1909년 8월에는 청년학우회가 조직되어 신민회의 외곽단체로서, 서울을 중심으로 평양·의주·안주 등지에 조직을 확대하면서 청년·학생 등의 인격수양과 민족의식의 배양에 노력했다.

한편 신민회 회원들은 전국 각지에 학회의 설립을 권장하기도 하고, 안악군면학회·해서교육총회·평양청년권장회 같은 학회를 조직하여 학교설립과 계몽활동을 촉진시켰으며, 기존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배후에서 지도하여 서북학회로 통합·재조직함으로써 교육구국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국민적 각성을 촉구하고 상업회의소·협동회 등의 상인단체를 조직하여 상권보호운동을 전개했으며, 나아가 신민회 회원들이 공동출자하여 시범적인 공장과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을 진흥시키려는 운동도 전개했다.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비롯하여 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와 같은 상회사, 안악에 소방직공장(小紡織工場)·소연초공장(小煙草工場) 등을 세웠고, 사리원에 모범농촌을 건설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또한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군 기지건설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의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여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사관을 양성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1910년 3월에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을 국권회복의 최고전략으로 채택하고,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 등 신민회 간부들이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고 독립군 기지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책을 협의했으나. 급진론과 점진론으로 나누어져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후 12월에는 국내에 잔류한 양기탁·주진수·이승훈·김구·이동녕 등이 전국간부회의를 열어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서간도에 한인집단이주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 신민회원을 대량 체포하여 신민회의 국내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었으나, 신민회 간부 이동녕·이회영 등은 그해 봄에 만주 펑톈 성[奉天省]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고, 사관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그밖에 신민회 간부들에 의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등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건설에 의한 독립전쟁 전략은 1910년 이후 여러 민족운동세력의 기본적인 독립운동 전략이 되었으며,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대규모의 독립군부대에 의한 항일 무장투쟁의 기초가 되었다.

해체와 의의

일제는 1911년 1월에 안악군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대의 애국적 지도자 160여 명을 검거했으며, 그해 9월에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 평안도지회의 회원을 비롯한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고, 특히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했다(→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이 검거 과정에서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조직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신민회는 국민국가 수립을 전제로 하여 국권회복을 내세웠던 운동으로서 민족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했으며, 언론계몽활동뿐만 아니라 학교의 설립을 통해 민족교육을 일으켰으며, 민족산업을 육성시키려고 했다. 한편 당시 애국계몽단체들이 대체로 실력양성론에 그쳤던 데 비하여 국내에서의 실력양성과 더불어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독립전쟁론에도 목표를 두고 실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신민회의 이념과 활동은 이 시기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의 투쟁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