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턴

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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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13. 11. 24, 아일랜드 티퍼래리 클론멜
사망 1768. 3. 18,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아일랜드 태생 영국의 소설가, 유머 작가.

줄거리보다는 화자의 자유연상과 일탈을 중시하는 소설의 효시인 〈트리스트럼 섄디 Tristram Shandy〉(1759~67)를 썼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지나가는 감상여행 A Sentimental Journey Through France and Italy〉(1768)도 유명하다.

아버지 로저는 요크 대주교의 손자였으면서도 말단 보병장교가 되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의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플랑드르에서 영내 가난한 매점 상인의 딸로 추측되는 장교 미망인 아그네스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가 로저보다 훨씬 낮은 신분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영국이 전쟁에서 발을 빼자 로저의 부대는 아일랜드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스턴이 태어났다. 부대를 따라 잉글랜드 여기저기를 옮겨다니거나 아일랜드의 병영에서 지낸 어린시절은 대체로 가난했다. 뒷날 스턴은 '우울한' 방랑중에 태어났다가 죽은 어린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했으며, 〈트리스트럼 섄디〉에서는 '토비 아저씨'와 '트림 하사'라는 신사들을 통해 군인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 10세 때 핼리팩스 가까이에 있는 하이퍼홀름에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친절한 교장 네이선 샤프는 스턴 집안과 친분이 있었으며, 숙부인 리처드 스턴의 토지가 근처에 있어서 그가 스턴을 돌봐주었다.

스턴은 자라면서 키가 훤칠하고 호리호리해졌으며, 코가 높으면서도 호감이 가는 얼굴이 되었다. 전에 학장으로 있던 스턴 대주교가 만든 장학금과 사촌의 도움 덕택에 케임브리지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다닐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따분하고 시대에 뒤진 것을 배웠으나, 존 로크의 사상을 처음 접하고는 그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며 솔트번 근처 스켈턴 성의 유지였던 존 홀 스티븐슨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와의 우정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대학시절에 처음 심한 각혈로 고통을 받았는데, "밤에 각혈이 일어나서 침대를 피로 흠뻑 적시곤 했다"고 표현했다. 이때 스턴은 치료가 불가능한 결핵에 걸렸다.

대학을 마친 뒤 사제서품을 받고 요크 북쪽에 있는 서턴온더포러스트의 비커(vicar)로 부임해 그곳에서 20년을 살았다. 그뒤 곧 요크의 참사원이 되었고, 스틸링턴 비커직을 받았다. 처음에 또다른 숙부 재크스 스턴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요크 대성당의 음악감독이자 클리블랜드의 대부제(大副祭)로서 세도 있는 성직자이긴 하나 비열하고 과격한 정치가였다.

1741~42년에 로버트 월폴 경이 이끄는 행정부를 지지하는 정치논설을 숙부가 창간한 신문에 썼으나 곧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손을 뗐다. 그때문에 숙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출세를 방해했다. 스턴은 블루스타킹의 일원이었던 엘리자베스 몬터규의 사촌 엘리자베스 럼리와 사랑에 빠져 1741년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성미를 드러냈고, 스턴은 점점 안정을 잃어갔다.

그녀와 다투고 난 뒤에는 요크에서 며칠 밤을 방탕하게 지내곤 하여 이웃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재크스 숙부의 부추김을 받은 어머니는 그의 아내가 갖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양도하라고 요구하며 그를 괴롭혔다. 스턴은 그 요구를 거절했다. 한번은 재크스 숙부가 조카를 난처하게 만들 작정으로 그의 부인을 감옥에 집어넣기도 했다.

그는 성직자로서 열심히 일하긴 했지만 좀 괴팍스러웠다.

일요일에 예배를 보다가 자기가 기르는 개가 메추라기를 날아가게 하자 신도들을 그냥 남겨놓고 집으로 총을 가지러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교구민들에게 따뜻하게 대했으며, 그들에게 자상한 종교적 교훈을 주었다. 교회재판에서 2번 판결을 맡았으며, 요크 대성당에서 자주 설교했는데 그때마다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1762년 결핵으로 목소리에 이상이 생겨 그만두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삶은 어느 정도 성공한 성직자의 전형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치안판사로도 봉사했고, 그림 그리기, 바이올린 연주 등의 취미도 즐겼다.

다른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곤 했던 그는 지방 유지들과 어울렸고, 이따금 스포츠맨과 아마추어 작가 동호인 집단인 '신들린 사람들'(Demoniacs)을 만나러 홀 스티븐슨의 '광인의 성'(Crazy Castle)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엘리자베스는 여러 아이를 사산했으며 살아 남은 아이는 리디아뿐이었다.

1759년 교회 안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자신의 참사회장을 편들어, 교회재판소의 고위 성직자들을 스위프트 식으로 풍자한 〈정치 로맨스 A Political Romance〉를 썼는데 〈The History of a Good Warm Watch-Coat〉로 제목을 바꾸었다.

난처해진 교인들의 요청으로 이 책은 소각되었다. 이 일로 성직자로서 출세할 기회는 놓쳤지만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알게 되었다. 자기가 맡고 있던 교구를 보좌 신부에게 떠맡기고 〈트리스트럼 섄디〉를 쓰기 시작했다. 신랄한 풍자물로 추정되는 초판의 인쇄를 런던의 인쇄업자 로버트 도즐리가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이때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나쁜 일이 몰아닥쳤다. 어머니와 숙부가 죽은데다가 아내는 정신분열을 일으켜 자살을 기도했다.

스턴은 이 희극적인 소설을 계속 썼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그의 말대로 "더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써내려간" 것이었다. 이러한 기분 때문에 풍자의 펜끝은 무디어졌고, 때로는 유쾌하고 또 때로는 감미로운 우수가 깃든 연민어린 유머를 섞어 트리스트럼의 생각, 별난 그의 집안, 불우한 어린시절 이야기를 써나갔다. 이 작품은 비극을 비껴나간 희극이었다.

1759년말 요크에서 1·2권을 직접 출판했으나 찍어낸 책의 절반을 런던에서 팔기 위해 도즐리에게 보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성악가 캐서린 포맨틀과 바람을 피웠다. 3월쯤 런던으로 가보니 〈트리스트럼 섄디〉가 성공해 그는 유명해졌으며 도즐리의 동생 제임스가 새 경영자가 되어 재판을 찍어냈다. 그뒤 스턴의 설교집 2권이 잇따라 출판되었다. 스턴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 재치 있고 버르장머리 없는 '트리스트럼 섄디'나 작품 속에 나오는 스턴의 자화상격인 '요리크 교구목사'는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시기가 우연히 일치한 것이긴 했지만, 요크셔에서 이웃에 살던 포컨버그 경이 칵스올드를 그의 3번째 교구로 추천했다.

기쁨에 넘쳐 북부로 돌아간 스턴은 칵스올드에 자리잡고, 매력적이고 기이한 낡은 집으로서 지금은 박물관이 된 섄디 홀에서 지냈다. 해마다 여름이면 섄디 홀에서 작품을 쓰고 겨울이면 런던으로 가서 그동안 쓴 것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도즐리에게 〈트리스트럼 섄디〉 제2권 이후의 출판을 맡긴 뒤에는 자기가 직접 출판업자로 나섰다. 런던에서 많은 명사들과 어울리기를 즐겼으나, 밤이면 난잡한 생활을 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

1762년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뒤 영국의 축축한 공기를 피해 프랑스로 갔다. 그는 이 여행을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트리스트럼의 도피라고 묘사했다. 병으로 목소리가 상했는데, 끝내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여행과 뒤의 2번째 외국여행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지나가는 감상여행〉의 소재를 많이 얻었다.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가 프랑스로 따라왔는데, 그녀는 그곳에 정착했으며 스턴 혼자 영국에 돌아왔다.

1767년 〈트리스트럼 섄디〉 마지막권을 출판한 뒤 엘리자베스 드레이퍼를 알게 되었는데, 스턴의 삶에서 아내를 제외하고는 가장 중요한 여인이었다.

동인도회사 관리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나이가 스턴의 절반밖에 안 되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기질과 관심사에 끌렸다. 그들은 그녀의 남편 다니엘 드레이퍼가 엘리자베스에게 봄베이(지금의 뭄바이)로 돌아오라고 명령할 때까지 드러내놓고 감상적인 불장난을 했다. 그녀가 떠나자 스턴은 몸이 매우 쇠약해져 있었으면서도 〈엘리자에게 바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은 자신의 가슴앓이를 애절하게 써내려간 것인데, 출판할 의도는 아니었다. 스턴은 그해 가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지나가는 감상여행〉을 완성해 출판하고는 쓰러졌다. 런던의 하숙집에 누워서 마치 누가 때리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팔을 치켜들고 "이제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런던에 묻힌 즉시 스턴의 시신은 도굴꾼에게 도난당해 케임브리지대학교 해부학 강의용으로 쓰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의 시신을 알아보는 바람에 시신은 조용히 무덤에 다시 묻혔다. 이 이야기는 그 당시에는 소문으로만 떠돌았으나 1969년 사실로 확인되었다. 옛 무덤이 아파트 터로 팔려서, 유골은 섄디 홀 가까이에 있는 칵스올드 교회묘지에 이장되었다. 파격적이고 줄거리가 없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너그럽고 연민어린 유머가 구사되어 있지만, 신랄한 풍자물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그의 작품을 가리켜 "이제까지 씌어진 가장 뛰어난 도덕 강의록"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적 암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스턴 자신의 여성편력은 독자들의 열렬한 성원에 찬물을 끼얹었다. 오늘날에는 근대 심리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