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탐볼리스키

스탐볼리스키

다른 표기 언어 Aleksandŭr Stamboliyski 동의어 알렉산다르 스토이메노프 스탐볼리스키, Александър Стоименов Стамболийски
요약 테이블
출생 1879. 3. 1, 불가리아 슬라보비차
사망 1923. 6. 14, 슬라보비차 근처
국적 불가리아

요약 불가리아의 농민당 지도자.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을 지지하는 국왕 페르디난드에 반대하고 연합국의 대의명분을 지지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 개혁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1919~23). 독일에서 농업대학을 다닌 뒤 언론계로 방향을 바꾸어, 1902년 새롭게 결성된 '농민동맹'의 기관지 편집인이 되었다.

평생 동안 농민의 이익을 위해 일했고 1908년 불가리아 농민당 당수로서 의회에 들어갔다. 불가리아 국왕 페르디난드와 수없이 논쟁을 벌였는데, 이 논쟁은 불가리아가 독일을 편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준비를 하고 있던 1915년 절정에 이르렀다.

스탐볼리스키는 러시아를 슬라브족의 해방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연합국의 대의명분을 지지했고 왕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을 위협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18년 9월 석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불가리아 군대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반란을 일으켜 페르디난드를 퇴위시키고 불가리아 공화국을 선포했다. 반란이 실패해 페르디난드의 아들인 보리스가 왕위에 올라 군주제가 회복되었지만 스탐볼리스키는 1919년 1월 각료가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총리가 되었다.

그는 연합국과 뇌이 조약(1919. 11. 27)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 영토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처럼 인기 없는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농민당은 1920년 3월 실시된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얻었다. 도시와 공업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던 스탐볼리스키 정부는 토지를 농민에게 재분배하고 사법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농업협동조합·보통선거권·지방자치제도를 지지했다.

스탐볼리스키가 뇌이 조약의 규정을 충실히 이행하자 연합국은 전쟁 배상금을 감면해주었다. 그는 공산당의 '적색동맹'에 반대하는 '녹색동맹'을 창설하기 위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농민 지도자들과 유대를 맺었지만 이 국제 농민운동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는 니시 조약(1922)으로 유고슬라비아와 관계를 개선하고,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남슬라브 연방을 결성하기를 원했다.

그는 1923년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의 국내정책과 평화주의적 경향, 유고슬라비아와의 화해, 정규군과 별도로 민병대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못마땅하게 여긴 군부는 1923년 6월 9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권좌에서 쫓아냈다. 스탐볼리스키는 고향 근처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알렉산더 스탐 볼리 스키 (Aleksandŭr Stamboliyski ) 기념상
알렉산더 스탐 볼리 스키 (Aleksandŭr Stamboliyski ) 기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