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렐

스코렐

다른 표기 언어 Jan van Sco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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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95. 8,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알크마르 근처 스코렐
사망 1562. 12. 6, 위트레흐트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의 인본주의자·건축가·기술자·화가.
Scorel은 Scoreel, Schorel, Schoreel, Schoorel, Schooreel, Schoorl, Scorelius,Scorellius라고도 쓰며, Maitre de la Morte de Marie라고도 함.

그의 스승인 얀 호사르트가 브뤼셀에서 그랬듯이 스코렐은 네덜란드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정립했다.

스코렐은 지방의 몇몇 미술가 밑에서 공부하다가 1517년 위트레흐트에서 호사르트와 함께 작업하면서 그로부터 여행 권유를 받았다. 1519년에 독일에 가서 뉘른베르크에 머무는 동안 알브레히트 뒤러를 방문했으며 스위스를 여행하고 이어서 베네치아로 갔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조르조네와 자코포 팔마의 작품에 감명을 받았으나 이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 키프로스·로데스·크레타 등지를 여행했다.

그후 스코렐은 위트레흐트 출신의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짧은 재임기간중에 로마로 가서 교황청 소장품의 관리인 겸 벨베데르의 감독관이 되었다. 교황은 바티칸 궁전 내에 그의 작업실을 마련해주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1523).

스코렐은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1524년에 평생 동안 소득을 보장받는 위트레흐트 대성당 참사회원 직책을 맡아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네덜란드에 돌아온 직후 완성한 대형 작품들에서 스코렐은 나체상이라든가 고전적 의상과 건축, 광대한 상상적 풍경 같은 이탈리아풍의 요소들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초상화에서 나타났다.

현존하는 초상화들은 좀더 관습적인 북구풍 양식으로 그려진 것으로 그가 성격묘사에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코렐의 대표적인 초상화로는 〈아가타 스콘호벤 Agatha Schoonhoven〉(1529,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젊은 학자 Young Scholar〉(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뵈닝헤 미술관)·〈베네치아의 귀족 Venetian Nobleman〉(독일 올덴부르크 미술사박물관) 등이 있다. 종교적 주제에 입각한 그의 작품들, 특히 다수의 제단화들은 대부분 16세기에 개신교의 성상파괴주의자들 손에 파괴당했지만, 위트레흐트와 하를렘에는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그린 집단 초상화들이 남아 있다.

스코렐은 자신의 회화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주의와 북유럽 미술의 자연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으며 다음 세대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