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스테파노

다른 표기 언어 Saint Stephen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36경, 예루살렘

요약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이다. ‘성전과 율법’에 거슬리게 말한 혐의로 고소당한 후 예루살렘에 있는 랍비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 소환되었다. 이때 스테파노가 한 변호는 초대그리스도교 신앙의 독특한 요소를 보여준다. 그의 변론은 듣는 자들을 분노하게 했고, 그 결과 그는 돌에 맞아 순교했다.
스테파노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곳의 제사의식을 철저히 반대했다. 모세 율법은 존중했으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율법에 합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스테파노가 볼 때 성전 건축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와 견줄 만한 일종의 우상숭배 행위였다. 스테파노는 바울로 신학 이전의 그리스도교 운동을 매우 유대교적인 방법으로 대변했다.

스데파노(Saint Stephen)
스데파노(Saint Stephen)

그가 산헤드린에서 한 변호(사도 7)는 초대 그리스도교 신앙의 독특한 요소를 보여준다.

그의 변론은 듣는 자들을 분노하게 했고, 그결과 그는 성 밖으로 끌려나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식 이름이며, 〈사도행전〉 6장을 통해 그가 헬라파(Hellenist) 유대인, 즉 그리스어를 일상어로 사용한 외국 태생의 유대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살았고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소수를 이루고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 공동체의 늙은 과부들에 대한 보호가 소홀하다고 불평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회중 앞에서 지적하면서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음을 강조했고,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7명의 부제를 선출했다. 7명의 부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지게 된 스테파노는 복음전도자로서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회당에 소속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신앙 논쟁을 벌였다.

'많은 제사장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의 수가 증가하자 유대교 지도자들이 분노하여 반발했다. 스테파노는 예루살렘에 있는 랍비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 소환되어 '성전과 율법'에 거슬리게 말한 혐의로 고소당했는데, 당시 이 죄목으로 체포된 사람은 너무도 많았다. 스테파노가 산헤드린에서 변론한 내용이 그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주요근거가 된다.

스테파노의 대답은 내용면에서는 유대교적이었고, 형식면에서는 헬레니즘의 전통 수사법을 따랐다(여호 24 : 2~14, 사도 3 : 12~26). 많은 학자들은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스테파노의 공동체가 사마리아로 이주했을 것으로 가정하고, 스테파노의 공동체가 사마리아와 연관되었다고 본다.

이 학자들은 스테파노의 연설은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대로 〈루가의 복음서〉의 본문에 삽입되기까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래의 내용이 수정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전과 율법에 관한 스테파노의 연설이 비록 본래 그가 가졌던 독자적인 확신이라고 할지라도, 사마리아인들의 귀에는 거슬리지 않았을 것이다. 스테파노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곳의 제사의식을 철저히 반대했다.

모세 율법은 존중했으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율법에 합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스테파노의 연설은 당시의 해석 가운데 영향력을 행사하던 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모세는 '지도자요 재판관'이었고(사도 7 : 35), '살아 있는 계시', 즉 참된 율법을 전했으며, 하느님이 자기를 세우셨듯이 또다른 선지자(예수)를 세울 것이라고 약속했다(사도 7 : 37). 스테파노는 예수를 '모세 종교를 회복시키는 사람'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는 아론과 모세, 성전과 성막,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과 성전을 짓지 말라는 설득을 받은 다윗을 각각 대조시켰다.

스테파노가 볼 때 성전 건축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와 견줄 만한 일종의 우상숭배 행위였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서는 사시지 않습니다."(사도 7 : 48)

성전에 대한 스테파노의 생각은 초대 그리스도교도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바울로를 비롯한 초대 그리스도교도들은 계속 성전에 자주 갔다. 성전의 제사의식들은 예수의 죽음을 통한 구원의 신학적 이해를 형성하는 데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스테파노가 예수의 죽음에 교리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암시는 없다. 반면에 학자들은 스테파노가 예수의 재림(2번째 오심)을 기대한 최초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스테파노는 연설을 마칠 때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계신 것'을 보았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종말론적·묵시론적 의미가 매우 깊게 함축되어 있으며, 〈신약성서〉에서 스테파노가 사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수만 사용했다. 바울로는 예수가 '율법의 저주'(갈라 3 : 13)로부터 구원을 가져다주었다고 가르쳤다.

스테파노에게 구원은 모세의 전승이 순결하게 재생하는 것을 기다리는 데 있었다. 그는 비록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였지만, 그의 신앙은 신약사상 만큼이나 구약사상에도 근거했던 것 같다. 스테파노(사울은 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함)는 바울로 신학 이전의 그리스도교 운동(이 운동의 요점은 여러 번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알 수 없음)을 매우 유대교적인 방법으로 대변했다. 고대 교회에서 스테파노의 유산으로 간주되는 것은 매우 미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