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

다른 표기 언어 Franz Josef Stra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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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5. 9. 6, 독일 뮌헨
사망 1988. 10. 3, 레벤스부르크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정치가.

오랫동안 바바리아 기독사회연합의 지도자로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뮌헨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과 충돌을 일으킨 가톨릭 청년조직의 열성적인 당원이었다. 1939년 징집된 그는 제2차 세계대전말경 미군에 의해서 생포되었다. 1945년 석방된 그는 바이에른 주의 내무부에서 시의원으로 일했으며, 1945년 미 점령당국에 의해 숀가우 지역 부군수로 임명되었다.

슈트라우스는 1945년 바이에른 기독사회연합(CSU) 창당을 도왔으며, 1949년 8월에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3년 9월에 재선된 그는 콘트라 아데나우어에 의해서 무임소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55년에 원자력부장관과 방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56년 10월에는 아데나우어가 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1962년까지 국방장관을 지낸 슈트라우스는 서독의 재무장관을 감독했으며, 연방군의 창설과 전술적인 핵무기 보유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슈트라우스의 정치적 미래가 앙양된 것은 1961년 그가 CSU의 의장이 되었을 때였다. 그는 1962년 10월 '슈피겔 사건'에 연루되었다. 당시 슈트라우스를 자주 비난했던 주간 뉴스 잡지 〈슈피겔 Der Spiegel〉의 편집자가 체포되고, 그 원고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활동에 관한 사설을 간행했다는 이유로 반역 혐의 증거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경찰의 행동은 여론을 심하게 동요시켰기 때문에 슈트라우스는 12월 내각에서 사퇴해야만 했다. 그는 여전히 CSU의 지도자로 남아 있었으나 1966년 재무장관으로 다시 정부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이 직위는 1969년 선거 때까지 계속되었다.

1969년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SPD)과 자유민주당(FDP)이 권력을 장악했다. 바이에른 주에서 슈트라우스의 권력은 점차 강화되어 1978년 11월 그는 바이에른 주정부의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1979년에는 야당인 CSU와 기독민주연합(CDU)이 슈트라우스를 1980년도 자기당 소속 서독 총리후보로 지명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슈트라우스의 정치적 성향을 우파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리로 선출되지 못했다.

슈트라우스는 동방정책(화해의 정신에 입각해 서독과 동유럽의 관계를 개선시키고자 한 정책)을 추진했던 사회민주당 소속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국내외 정책을 계속해서 비판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그는 그의 정치적 자세를 수정하여 동유럽과 서유럽 간의 보다 많은 경제적 교류를 지향하게 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죽을 때까지 바바리아 주정부의 총리로서 그리고 CSU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그가 추진한 경제 정책은 바이에른 주를 서독의 가장 번창한 주(州) 중의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슈트라우스의 저작으로는 〈거대한 구상 : 유럽 문제의 해결에서 독일의 재통일까지 The Grand Design : A European Solution to German Reunification〉(영역본, 1965)·〈도전과 응전 Herausforderung und Antwort〉(1968)·〈재정정책 : 이론과 실제 Finanzpolitik : Theorie und Wirklichkeit〉(1969)·〈독일, 당신의 미래 Deutschland Deine Zukunft〉(1975)·〈조건에 관하여 Zur Lage〉(1979)·〈자유의 교훈 Gebote der Freiheit〉(198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