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재

수륙재

다른 표기 언어 水陸齋

요약 아귀회·시아귀회와 같은 취지이다. 아귀란 6도(또는 5도)의 윤회에서 지옥의 위, 축생의 아래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보통 기아 상태의 고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시아귀회는 아귀도에 빠져 고통받는 모든 중생에게 음식을 베풀어 공양하는 법회를 말한다.
수륙재는 중국 양나라 무제가 505년에 시행했던 것이 시초이다. 무제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6도 4생의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수륙재를 베풀어 그들을 제도하는 것이 으뜸 가는 공덕이라고 말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971년 수원 갈양사에서 처음 시행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수륙재의 형식을 규제하기도 했으나 폐지하지는 않았다. 세종이 위독할 때 구병을 위한 수륙재가 올려진 것으로 보아 계속했던 것 같다.

아귀회(餓鬼會)·시아귀회(施餓鬼會)와 같은 취지이다. 아귀란 6도(또는 5도)의 윤회에서 지옥의 위, 축생의 아래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보통 기아 상태의 고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시아귀회는 아귀도에 빠져 고통받는 모든 중생에게 음식을 베풀어 공양하는 법회를 말한다.

일찍이 10대 제자 중 목련(目連) 존자가 지옥의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시행했다는 설화에서 유래하는 우란분회(于蘭盆會)도 이런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실제 특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시아귀회는 우란분회에서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

수륙재는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가 505년에 시행했던 것이 시초이다. 무제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6도 4생의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수륙재를 베풀어 그들을 제도하는 것이 으뜸 가는 공덕이라고 말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971년(광종 22) 수원 갈양사에서 처음 시행했다. 1093년(선종 10)에는 최사겸(崔士謙)이 송(宋)에 가서 수륙의문(水陸儀文)을 구해와 이를 안치하기 위하여 보리사에 수륙당(水陸堂)을 짓다가 화재가 발생했으며, 1348년(충목왕 4)에는 왕이 병이 나자 덕녕공주가 천마산에 수륙재를 개설하고 기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수륙재의 형식을 규제하기도 했으나 폐지하지는 않았다. 태종의 상(喪)을 올릴 때부터 규모가 한정되었지만, 세종이 위독할 때 구병(求病)을 위한 수륙재가 올려진 것으로 보아 계속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는 12세기에 시작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한반도 평화기원 수륙재(水陸齋)
한반도 평화기원 수륙재(水陸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