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

소수림왕

다른 표기 언어 小獸林王 동의어 소해주류왕, 고구려 제17대 왕, 고구부, 高丘夫, 小解朱留王, 해미류왕, 解味留王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384(소수림왕 14)
국적 고구려, 한국
재위 371년~384년

요약 율령 반포와 태학 설치, 불교 수용 등으로 고구려 전성기를 이룩한 고구려의 제17대 왕. 이름은 구부. 아버지 고국원왕의 장남으로,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위기 속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국가의 지배체제 정비에 힘을 써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치하는 등의 일을 했다. 순도와 아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도 소수림왕 때이다. 대외적으로는 백제에 대한 견제를 계속하면서도 북중국의 전진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북방의 경비에 따른 국력의 분산을 최소화하여,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보다 공고히 하였으며, 이후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는 토대를 마련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생애
  3. 주요 업적

개요

고구려 제17대 왕(재위 371∼384년).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장남이다.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였으며, 전진(前秦)에서 불교를 도입하는 등 전반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는 데 기여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등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초기 생애

체격이 건장했고 머리가 좋았다. 355년에 아버지 고국원왕에 의해 태자로 책봉된 후, 능력을 인정받아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나라인 전연(前燕)에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 전연에 인질로 잡혀있다가 370년에 전연이 망한 후 귀국했고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군과의 평양성 전투에서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4세기 후반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멸망시킴으로써 백제와 국경을 접했던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활발히 전개하여 백제와 첨예한 대립을 하던 시기였다. 고구려가 남진해오자 백제의 근초고왕이 3만 명의 군사를 보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오히려 백제의 기세가 상승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안팎으로 위기를 맞은 시기였다.

주요 업적

소수림왕은 부왕의 전사에 따른 국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롭게 지배체제를 정비해야 하는 시기에 즉위하여, 즉각적으로 국가 체제 정비에 나섰다. 372년 전진(前秦)에서 승려 순도(順道)가 외교사절과 함께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왔으며, 374년에는 아도(阿道)가 들어와 불교를 전래했다. 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해 각각 순도와 아도를 머물게 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부터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372년에 유교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치해 귀족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쳤고, 다음해에는 율령을 반포했다. 율령의 반포는 이전의 여러 관습법 체계를 재구성하고 성문화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이를 통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보다 공고히 정비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바탕 위에서 광개토왕대에 대외팽창을 활발히 전개하여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소수림왕의 치세 하에,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백제에 대한 견제를 계속했다. 375년 7월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북 신계군)을 침공했고, 다음해에는 백제의 북쪽 국경을 공격했으나 3만 명의 백제군에게 평양성을 역습당했지만 역습으로 이를 격퇴하고 백제를 정벌했다. 한편 남쪽의 백제에 전력을 기울이던 틈을 타서 378년에는 거란이 북쪽의 변방을 기습하여 8개 부락이 함락되기도 했다.

대체로 소수림왕의 재위시기에는 북중국의 전진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북방의 경비에 따른 국력의 분산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국가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것이 가능했다.

죽은 뒤 소수림(小獸林)에 장사지냈다. 아들이 없어 동생 이련(伊連)이 즉위했는데, 그가 고국양왕(故國壤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