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격서

소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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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도교의 제천행사로 삼청성진에게 지내는 초제를 담당했다. 이와 함께 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도학생도의 정원은 10여 명이었다.
유교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은 개국하면서 도교의 궁관과 전당을 없애고 소격전과 대청전만 남겼다. 1466년 이름을 소격서로 바꾸었고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소격서 혁파논의가 대두되어 1518년 소격서를 혁파했으나 1522년 대왕대비의 병환을 구실로 다시 회복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유교주의 정치의 정착과정에서 전통적인 관습·제도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소격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도교의 제천행사로 삼청성진(三淸星辰 : 上淸·太淸·玉淸으로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곳)에게 지내는 초제(醮祭)를 담당했다. 이와 함께 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도학생도의 정원은 10여 명이었다. 관원으로 제조 1명, 별제 2명, 종5품 영 1명, 종9품 참봉 2명을 두었으며, 영과 별제는 모두 문관으로 임명했다. 유교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은 개국하면서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도교의 여러 궁관(宮觀)과 전당(殿堂)을 없애고 소격전과 대청전(大淸殿)만 남겼다.

1396년(태조 5)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소격전과 삼청전을 새로 설치했다. 1466년(세조 12) 관제개정 때 이름을 소격서로 바꾸었고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덕목에 의한 실천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소격서 혁파논의가 대두했다. 최초의 혁파논의는 1479년(성종 15)에 제기되었다. 그러나 제천의식과 기우제 등은 국가적인 큰일이고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혁파할 수는 없다 하여 비용을 줄이거나 청결하게 제사하는 선에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1496년(연산군 2)에 다시 혁파논의가 발생했는데, 소격서가 비용만 많이 들고 국가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에 소격서를 안양군(安陽君) 항(行)의 집으로 옮겨 공식적으로는 혁파된 셈이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자 소격서는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혁파논의가 강하게 대두했다. 이들은 소격서가 노자를 숭상하는 이단이며, 제후의 나라인 조선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결국 1518년(중종 13) 유신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집요한 요청으로 소격서를 혁파했으나 1522년 대왕대비의 병환을 구실로 다시 회복시켰다. 이와 같은 소격서의 혁파와 복설은 유교주의 정치의 정착과정에서 전통적인 관습·제도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소격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