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니에

셰니에

다른 표기 언어 André(-Marie) de Chénier
요약 테이블
출생 1762. 10. 30, 이스탄불
사망 1794. 7. 25,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정치언론인.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죽은 뒤 25년이 지날 때까지 거의 출판되지 않다가 1819년에 첫번째 시집이 나오자 당장 성공을 거두어, 낭만파 시인들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언론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셰니에의 영향력은 19세기 전반에 걸친 시적 경향에서 나타난다. 샤토브리앙의 〈그리스도교의 정수 Le Génie du christianisme〉(1802)에서, 생트 뵈브의 〈조제프 들로름 Joseph Delorme〉(1829)에서, 비니의 〈스텔로 Stello〉(1832)에서, 그리고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앙드레 셰니에 Andrea Chénier〉(1896) 등에서 찬양한 그의 정치 투쟁과 영웅적인 죽음에 얽힌 전설은 그를 유럽의 영웅적 시인으로 상징하게끔 만들어주었다.

어머니를 통해 그리스인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언제나 고전 문학, 특히 애가체 시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는 진보적인 나바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1782~83년에 군대생활을 했지만, 직업 군인이 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그후 5년 동안 공부에 열중했다. 1787년에 그는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관의 한 직책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당시 그는 서사시적인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고, 특히 신세계에 대한 시를 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심리적인 억압 때문에 좀처럼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런던 생활은 불행했으며 좌절된 야망과 자신에 대한 회의로 괴로워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파리로 돌아간 그는 정치적 언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군주제 지지자들의 지나친 반동과 혁명가들의 지나친 공포정치라는 두 극단을 모두 공격하기 시작했다. 셰니에는 정치적으로 천진난만한 철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닫고 있었다. 이따금 셰니에는 불필요할 만큼 자기 자신을 드러냈는데, 이는 그가 문학에서 추구하고자 한 근본주제인 도덕적 성실성을 지키려는 의지,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파멸시키고 싶은 막연한 욕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794년 3월에 그는 체포되어 생라자르 감옥에 갇혔고, 4개월 뒤 혁명 지도자인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기 며칠 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이 며칠만 더 일찍 일어났다면, 셰니에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셰니에의 업적은 그리스 서정시의 특징들이 프랑스 시에 얼마나 많은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가를 실제로 입증한 것이었다. 혁명기에 쓴 작품(감옥에서 세탁물 바구니에 숨겨 몰래 밖으로 내보낸 시들을 포함하여)에서 그는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을 열렬히 옹호했다.

처형당하기 며칠 전에 쓴 마지막 작품 〈풍자시 이미지ambes〉는 박해에 맞서는 인간의 정신을 감동적으로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