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서정주

다른 표기 언어 徐廷柱 동의어 미당, 未堂, 궁발, 窮髮, 다쓰시로 시즈오, 達城靜雄
요약 테이블
출생 1915. 5. 18, 전북 고창
사망 2000. 12. 24,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시인. 동양적인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줬다. 대표작으로 <자화상>, <벽>이 있다.

호는 미당·궁발. 시세계의 폭넓음과 깊이로 해서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힌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부안 줄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곧 자퇴하고 박한영의 도움을 받아 대한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941년 동대문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아대학교·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60년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에는 좌익측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하여 우익측이 결성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사 문화부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역임했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 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때는 종군 문인단을 결성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천되었고,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서정주
서정주

문학세계

1933년부터 〈동아일보〉와 〈학등〉에 3~4편의 시를 발표한 뒤, 1935년 〈신건설〉에 〈자화상〉을 발표하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벌였다.

1936년 김광균·김달진·김동리·김진세·여상현·오장환·함형수 등과 함께 시전문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여기에 〈화사 花蛇〉·〈달밤〉·〈방 房〉 등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43년 친일 성향의 출판사인 인문사에서 발행한 잡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보며 친일 시들과 종군기 등을 썼다.

이때의 친일 행각은 1980년 전두환 군사정부를 찬양한 일과 함께 그에게는 씻을 수 없은 과오가 되었다. 친일소설인 〈최체부(崔遞夫)의 군속지망(軍屬志望)〉(조광, 1943. 9)을 비롯한 소설 2편과 많은 평론이 있지만, 20권이 넘는 시집을 포함한 시선집의 분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창작의 주류는 시였으며, 시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첫 시집 〈화사집 花蛇集〉(1941)에서부터 2번째 시집 〈귀촉도 歸蜀途〉(1948) 이전까지의 시기로,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생명의식이 그 특징을 이룬다. 〈화사집〉에 실린 〈자화상〉·〈문둥이〉·〈화사〉·〈입맞춤〉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이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자화상〉은 그때까지 삶의 내면적 방황과 좌절, 그리고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는 의식세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화사〉에서의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과 '붉은' 색조는 그의 보들레르적 관능과 원시적 생명력의 추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번째 단계는 2번째 시집 〈귀촉도〉에서 시집 〈서정주시선〉956) 이전까지의 시기로, 초기의 관능적인 세계를 벗어나 동양적인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특히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노래하게 된 과정이 이 시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시로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꽃〉(민심, 1945. 11)·〈국화옆에서〉(경향신문, 1947. 11. 9) 등이 있다. 〈국화옆에서〉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격정과 관능, 절망과 분열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안식처로서의 '꽃'과 '누님'의 발견은 곧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귀촉도〉(춘추, 1943. 10)·〈춘향유문 春香遺文〉(민성, 1948. 5) 등에서와 같이 한국적 정서를 탐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화사집〉류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으며, 〈무등에서〉(현대공론, 1954. 8)·〈상리과원 上里果園〉(현대공론, 1954. 11)·〈산중문답 山中問答〉(현대문학, 1955. 1) 등에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관념적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생명의 발견과 달관, 동양적인 정관의 입장은 화해를 바탕으로 하며, 여기서의 화해는 사회현실과의 치열한 대결 끝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인 갈등과 회의를 거쳐 얻어진 것으로 이후의 시적 변모에 큰 영향을 준다.

3번째 단계는 시집 〈신라초 新羅抄〉(1961)와 〈동천 冬天〉969)이 나온 시기로, 신라의 정신과 새로운 동양사상의 탐구가 중심이 된다.

앞시기에 얻어진 화해의 마음은 심화되어 전래의 샤머니즘뿐만 아니라, 노장사상이나 유교까지 받아들이고 있으며 특히 불교의 윤회사상과 인연설에 열중하고 있다. 시집 〈신라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얻은 '신라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신라를 하나의 역사적 공간이 아니라 화해에 의해 인간과 자연, 신화가 융합된 초월적 세계로 보았다.

시집 〈동천〉에서는 〈신라초〉에서 얻은 동양적 정신을 좀더 심화시켜 고전적인 절제의 경지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지칠 줄 모르고 구도자의 행로를 걸어온 시인의 자신감과 원숙의 경지를 입증해주는 한편, 사회와 역사와 멀어진 개인적 구도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세계로의 도피, 형이상학으로의 도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여섯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975) 에서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사람들과 풍속을 산문 양식에 담아내 동양적 정신을 확대하여 '고향'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로도 정력적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해 〈떠돌이의 시〉(1976)·〈산시 〉(1991)·〈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의 시집을 냈다. 1983년과 1991년 2번에 걸쳐 민음사에서 〈미당 서정주 시전집〉을 펴냈다. 그밖에 평론집으로 〈시창작교실〉(1956)·〈시문학 개론〉(1959)·〈한국의 현대시〉(1969)·〈시문학 원론〉(1983) 등을 펴냈다.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타계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