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서숙

서전서숙

다른 표기 언어 瑞甸書塾

요약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이동녕·여조현 등이 민족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06년 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처음 학생수는 22명이었고 학과목은 역사·지리·정치학·수학·국제법·헌법 등이었으며, 철저한 항일·애국독립 사상 고취에 중점을 두었다.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에 파견되었다가 용정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고 항일교육을 근절하려는 일제의 시도가 계속되었다. 서전서숙은 이전하여 탑두구 근처에서 수업을 계속했으나, 1908년 8월 졸업식과 동시에 폐교하고 말았다.
이 학교의 민족교육방침은 이후 명동서숙·한민학교 등의 설립과 항일독립운동 조직에 영향을 끼쳤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조현(呂祖鉉)·정순만(鄭淳萬)·박무림(朴茂林)·왕창동(王昌東) 등은 해외 한인의 민족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각 지역에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06년 이들은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있고, 북쪽으로 러시아와 통해 외교가 편리하며, 한국과 거리가 가까워 국권회복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간도 옌지 현[廷吉縣] 용정에 우선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용정 천주교 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매입, 학교건물로 개수하고 학교명을 서전평야에서 따 서전서숙으로 명명했다. 숙장은 이상설, 교사는 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 등이었고, 운영은 이동녕·정순만이 맡았다. 모든 경비는 이상설이 부담했다.

처음 학생수는 22명이었고 학과목은 역사·지리·정치학·수학·국제법·헌법 등이었으며, 철저한 항일·애국독립 사상 고취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07년 3월 이상설이 이준(李儁) 등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일제의 신병인도 요구 때문에 용정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항일교육의 근절을 위해 간도 보통학교를 개교하고 각지의 서당을 매수하는 한편 서전서숙 측에 매월 20원씩의 보조금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서전서숙 측은 이를 거절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훈춘[琿春] 방면으로 떠나 탑두구 근처에서 수업을 계속했으나, 1908년 8월 20일 졸업식과 동시에 폐교하고 말았다.

1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의 민족교육방침은 이후 이 학교 학생이었던 김학연의 명동서숙·한민학교 등 간도·연해주 지역의 많은 민족교육기관의 설립과 박무림의 간민자치회 등의 항일독립운동 조직에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