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응

서명응

다른 표기 언어 徐命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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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16(숙종 42)
사망 1787(정조 11)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서명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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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달성. 자는 군수(君受), 호는 보만재(保晩齋)·담옹(澹翁).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종옥(宗玉)이고, 영의정 명선(命善)이 동생이다. 홍양호(洪良浩)·박제가·문광도(文光道) 등과 사귀었다.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정언·헌납·부수찬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9년 동부승지가 되고 이후 대사간·대사헌·이조참의·황해도관찰사 등을 두루 지냈다.

1763년 우승지에 오르고, 예조참판·홍문관제학을 역임했다. 1769년 충청도수군절도사·한성부판윤을 거쳐 1770년 형조·이조·호조·병조 판서와 지경연사를 지냈다. 정조 즉위 뒤인 1777년(정조 1) 규장각제학·홍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판중추부사·수어사에 이어 1780년 봉조하가 되었다.

그는 태극·음양오행 등의 역리(易理)와 사단칠정 등 이기설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천문·일기(日氣) 등의 자연과학, 음률·진법(陣法)·언어·농업 등 다방면에 걸쳐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태도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여 북학파의 비조로 일컬어진다. 특히 농정은 천하의 대본이라 하여 독특한 농업이론을 펴고 있는데, 당시의 주자학자들이 정전제(井田制)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있은 뒤에나 가능하며 평상시에는 불가능하다는 주자(朱子)의 이론을 따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정전제의 시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박제가의 〈북학의〉의 서문을 쓰면서 조선의 농법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자연과학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영조 때 왕의 명령으로 악보를 수집하여 집대성하기도 했다. 〈역학계몽집전 易學啓蒙集箋〉·〈황극일원도 皇極一元圖〉·〈계몽도설 啓蒙圖說〉 등의 역서류(易書類)와 〈열성지장통기 列聖誌狀通記〉·〈기자외기 箕子外紀〉·〈대구서씨세보 大丘徐氏世譜〉 등의 사서류, 〈고사신서 攷事新書〉 등의 유서(類書)를 편찬했다. 저서로는 〈보만재집〉·〈보만재총서〉·〈보만재잉간 保晩齋剩簡〉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